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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1년
제목 [7. 25]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라!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1-07-25
조회수 25
첨부파일
p210725_질그릇 1단.pdf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

 

14그러므로 나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빕니다. 15아버지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붙여 주신 분이십니다. 16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18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19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20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에게, 21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3:14-21)

 

에베소서: 바울계 서신

여러분은 오늘로 3주째 에베소서를 본문으로 증언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성서일과’(Revised Common Lectionary)성령강림 후 일곱 번째 주일’(7/11)부터 열세 번째 주일’(8/22)까지 총 7주 동안 서신서 본문을 에베소서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증언 첫 시간 때, 이 서신에 관해 간단히 소개하려고 했었는데 (원고가 길어져서) 생략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잠깐 소개하고자 합니다.

에베소서는 골로새서와 마찬가지로 논쟁 서신중 하나입니다. ‘논쟁 서신이라 함은 이 편지의 저자가 바울이냐 아니냐가 논쟁거리다라는 뜻입니다. 일부 학자는 에베소서가 바울의 편지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학자 대부분은 에베소서가 바울의 편지가 아니라는 데 동의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어휘문장 스타일의 차이 때문입니다.

   

에베소서에는 바울의 친서에는 없는 50여 개의 새 어휘가 나옵니다. 또 바울의 문장은 짧고 힘찬데, 에베소서에는 길고 복잡한 문장이 자주 등장합니다. 또 같은 단어라도 뜻하는 내용이 다르고 신학 사상도 좀 더 발전된 면모를 보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를 바울이 말년에 썼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의 영향을 받은 한두 세대 후의 제자가 쓴 것으로 보는 것이 더 개연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학자 대부분은 에베소서를 바울 친서가 아니라 위서(僞書)라고 봅니다.

하지만 에베소서 역시 바울계 서신’(Pauline letter)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신학과 사상을 계승한 편지입니다. 어떤 점은 충실하게 계승했고, 어떤 점은 불충실하게 계승했지만 말입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의 가정규범’(5:21-6:9)에 나오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의 관계는 바울의 친서보다 후퇴했습니다. 즉 보수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에베소서가 바울의 친서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TextContext에 놓고 보아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기에, 바울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 바울 시대가 아닌 한두 세대 이후 시대에 쓴 편지라는 것을 알고 읽으면 에베소서를 오해하지 않고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은 그것과 큰 상관이 없습니다.

 

1찬양복습: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

제가 지지난 주에 증언한 1장 본문은 찬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기도입니다. 기도1장의 찬양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지지난 주 증언을 잠시 복습하고자 합니다.

원래 찬양은 꿈을 꾸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찬양은 지금 현재 삶을 더 낫게 바꾸겠다는 의지요 희망이며,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3절로 14절은 여러 교리적인 용어와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찬양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창세 이전의 선택과 예정, 십자가 사건, 성령의 인침과 같은 교리적인 용어와 개념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고, 찬양이 품고 있는 꿈과 희망과 믿음과 의지를 느껴 보라고 했습니다. 이 찬양을 부른 이들의 형편과 처지를 떠올리며,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시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때 했던 말을 복습해 보겠습니다.

 

1장 본문의 찬양을 드린 이들은 로마라고 하는 대제국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식민지 땅에서 시민권도 없이 살았습니다. 그들은 흙수저, 아니 그마저도 없이 수저로 태어난 이들이었고, 밑바닥 민중이었으며, 사회에서 아무 존재감이 없던 놈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언제부턴가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 비록 저들에게는 로마시민권이 없었어도 하늘시민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저들은 세상에 태어나면서 버려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세상 창조 이전에 택함 받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예정됐음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인 줄 알았더니 실은 백조였습니다. 비록 지금 땅에 살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늘 백성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이제 세상이 덧씌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허위의식, 즉 죄의식에서 해방됐습니다. 저들은 하늘에서 쫓겨난 시민이 아니었습니다. 세계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비밀 계획을 하나님과 함께 성취하고자 땅으로 파견된 하나님의 동역자였습니다. 그 증거는 약속된 성령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저들이 이런 깨달음에 이르게 된 결정적 계기는 예수 그리스도때문이었습니다. 예수는 저들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살다가 제국의 십자가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끽소리도 못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서부활시켜서 예수에 대한 세상의 평가와 처사를 뒤집어엎었습니다. 죽음을 부활로 뒤바꿈으로써 천지를 개벽하고, 새 세상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던 것입니다. 저들은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 안에서저들은 자신들도 하늘 시민, 신의 가족, 하나님 나라 상속자임을 깨달았고, 그런 존재답게 그때 거기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아냈습니다. 1장 본문의 찬양은 그것을 고백하고, 다짐하고, 결단하는 행진곡입니다.

 

중보 기도(仲保祈禱)를 드린 이유와 내용

오늘 본문 말씀인 에베소서 314절로 21절은 기도입니다. 특별히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 즉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 중보 기도입니다. 에베소서의 저자는(실제로는 바울이 아니지만, 편의상 바울라고 부르겠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1장의 찬양을 보면, 그들은 이미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눈뜬 사람이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성도(聖徒), 거룩한 사람’ (=saint)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성도는 완성사람이 아니라, 완성 되어가는사람입니다. ‘being’이 아니라, ‘becoming’입니다. ‘이미’(already)아직 아니’(not yet) 사이에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제까지 세상 쪽을 바라보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가, ‘회개를 통해 하나님 쪽으로 돌아선 사람, 방향전환을 한 사람이 성도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성화의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더구나 본문 바로 앞 절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13그러므로 여러분을 위하여 당하는 나의 환난을 보고서, 여러분이 낙심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당하는 환난은 여러분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겪는 환란을 보고 낙심했습니다. 꽃길만 걸을 줄 알았던 사도가 시련과 역경에 처하니, 그것을 보고 초대 교회 성도들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 드린 중보 기도가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바울이 드린 중보 기도에서 잔가지를 쳐내면 다음의 네 가지 청원 사항이 드러납니다.

 

(1)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기를(16),

(2)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17),

(3)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알게 되기를(18-19),

(4) 하나님의 온갖 충만함으로 충만해지기를(19)

 

사랑은 최강의 응원

저는 이 네 가지 청원 가운데 핵심은 세 번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나머지는 저절로 다 이루어집니다. ?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역경보다도 강하다면서 이렇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37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38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39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면 우리에게 더 이상의 환란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시련과 역경을 없앤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도 여전히 환란은 있습니다. 시련도 있고, 역경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것들을 능히 이기고도 남을 힘과 용기도 주신다고 하는 것이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최강의 응원입니다.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공장에 성악가를 꿈꾸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겨우 레슨을 받게 된 소년에게 선생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자네 목소리는 덧문에서 나는 바람 소리 같아. 성악가의 자질이 전혀 보이지 않는군.”

음악 교사의 이 같은 혹평에 소년은 실망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소년의 어머니는 의기소침해진 아들을 꼭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넌 할 수 있어. 절대 실망해서는 안 돼. 네가 성악 공부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엄마는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단다.”

소년은 엄마의 격려를 받으면서 열심히 노래했습니다. 비록 그 뒤에도 선생은 소년에게 칭찬 한 번 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배워가며 밤새 연습에만 매진했습니다. 결국, 23살 때 데뷔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성공할 때까지 그는 푼돈을 받고 무대에 올라야만 했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전설적인 테너 가수 엔리코 카루소입니다.

   

따뜻한 사랑의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위대함을 세상에 드러냈습니다. 한낱 덧문의 바람 소리 같다고 혹평받던 목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성으로 극찬받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그의 창법은 벨칸토의 모범, 아름다운(bel) 노래(canto)’ 가 창법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숱한 악조건 속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이 전설의 성악가 카루소의 버팀목은 어머니의 흔들림 없는 사랑,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실로 사랑은 최강의 응원입니다. 이렇듯이 사랑은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마력을 발휘합니다. 사랑이 있는 한,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하는 일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일의 성과가 크면 뿌듯해하고, 성과가 적으면 주눅이 듭니다. 또 사람들은 그것이 재산이든 학력이든 명예든 자기의 소유물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시간과 더불어 사라져 갈 것들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남들 앞에서 우쭐거리지도 않고 주눅이 들지도 않습니다. 한 일이 적어도, 가진 것이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이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 변할 수 없는 진실이 어떤 시련과 역경도 이기게 할 것입니다. 세상은 성공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이보다 나은 경우, 성공이 아니라 성취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공도 성취도 아닌 우리의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이렇듯 자신의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속 사람이 강건한사람입니다.

 

님이 오신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알게 되는 전제로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속에 머물러 계심을 언급합니다. 이 둘을 묵상하다가 함석헌 선생님의 시 <님이 오신다>가 생각났습니다.

시의 화자는 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일어납니다. 맑고 거룩한 님을 더러운 집에 모실 수 없어서, 쓸고 닦고 고치고, 묵은 때를 벗겨냅니다. 물을 뿌려 먼지도 가라앉힙니다. 하지만 아무리 닦아내도 여전히 더러운 것이 보입니다. 천정에는 거미줄이 보이고 방바닥은 더럽습니다. 그런데, 님이 오셨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얼굴도 손도 아직 엉망인데 말입니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그에게 님은 오히려 위로의 말씀을 건넵니다.

 

이 애 이 애 걱정 마라,

나도 같이 쓸어주마,

나 위해 쓸자는 그 방

내가 쓸어 너를 주고,

닦다가 닳아질 네 맘 내 닦아주마.

 

시인은 마침내 이렇게 고백합니다. 쓸자 닦자 하던 것은 마음뿐이고, 님이 손수 쓰시고는 나보고도 함께 앉자 하시니 내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은혜에 대해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말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모시려고 애쓰는 마음을 대견스레 여기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당신이 우리 속을 깨끗하게 해주시고는 우리에게도 쉬라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스스로 밝히지 못하던 마음이 저절로 밝아집니다. 애써도 깨끗해지지 않던 마음이 저절로 맑아집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알기에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마음속에 거하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

함석헌 선생님이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사랑의 깊이를 얼마나 압니까?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바울이 기도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초대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오직 하나만을 간구했다고 할 수 있습니. 본문 17절 하반절 이하를 보면, 바울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 그것 외에 달리 구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를 하면서 바울은 그들이 그 사랑을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20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넘치게 주시는 분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을 허락하시고, 그 사랑을 체험하게 하시며,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살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제게 제일 중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으로써 우리가 인생의 어느 길목에 있든지, “그 어떤 시련과 역경이 우리를 가로막아도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전진하는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