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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2년
제목 [4.17] 부활을 살자!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2-04-20
조회수 64
첨부파일
p220417_질그릇 1단.pdf



부활을 살자!

 

7그리고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기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될 것이라고 하여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다. (28:7)

 

상업화에 실패한 부활절

오늘 우리가 맞이한 부활절은 기독교의 생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절은 기독교에서 가장 큰 명절입니다. 이와 버금가는 명절은 예수님의 생일인 성탄절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먼저 제정된 명절은 부활절이었습니다. 성탄절은 그보다 훨씬 늦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습니다. 성탄절은 전 지구인의 축제일 되었고, 부활절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 이유를 미국장로교(PCUSA) 목사요 영성 신학자인 유진 피터슨은 부활을 돈벌이 기회나 팔아먹을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드는 데 실패했다고 논평한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탄절은 상업화에 성공했는데, 부활절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절은 왜 상업화를 못 했을까요?

저는 그 이유가 부활은 십자가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따로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불가분리적(不可分離的) 관계입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구분할 수는 있어도 결코 분리할 수는 없는 것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상업화고난의 상품화가 어려우니 부활의 상업화도 못 했던 것입니다.

부활은 혁명

부활의 상품화가 어려웠던 또 다른 이유는 부활이 혁명이었기 때문입니다. 혁명은 종래의 것들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upside-down(거꾸로)이요, re-volution(재회전, 뒤바꿈)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당파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어떤 사람에겐 복음(福音), 기쁜 소식, Good News지만, 다른 사람에겐 화음(禍音), 나쁜 소식, Bad News입니다. ?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당시 사회 기득권 카르텔의 시도는 예수 부활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들에게 예수 부활은 악몽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자꾸 무언가를 바꾸자며 저항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을 상품화할 바보 기득권자는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의 기독교 자체가 부활을 최고 상품화한 것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었던 구체적(具體的) 구원을정치적·경제적·이념적 해방을 추상화(抽象化)하고 내세화(來世化)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혁명을 정신과 종교의 영역에 꽁꽁 가둬버리고 무력화시켰습니다. 대속 신앙은 결국 내 희생은내 노력과 행동은 다 필요 없고, 예수의 십자가 보혈과 그 피를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라는 것 아닙니까? 구원을 위해, 해방을 위해 아무 행동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아닙니까? 십자가와 부활은 세트(set)인데, 십자가는 예수만 지고 부활은 내가 누리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 얌체 같은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러라고 그랬거나, 그래도 된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9:23)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오늘 부활을 살자라고 증언 제목을 정했는데, 이는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자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부활은 자기 십자가의 값비싼 귀결이지, 싸구려 공짜 선물이 아닙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영화 <존 큐, John Q>

오늘 부활절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예전에 보았던 <존 큐>라는 제목의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2002년 작품이니 벌써 20년이나 되었네요. 하지만 이 영화가 고발하고 있는 현실은 과거로 끝나지 않았고, 현재도 진행 중이며,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니 어쩌면 우리나라의 미래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철강공장에서 일하는 존 큐는 슈퍼마켓의 출납원으로 일하는 아내와 보디빌더가 꿈인 아들을 둔 평범한 미국 가정의 가장입니다. 공장에서 중기계를 15년 이상 다뤄온 숙련공인데, 자격과잉(overqualified)이라고 하여 직장에서는 그를 해고하고 계약직 사원으로 다시 채용합니다.

어느 날 동네 리틀야구단에서 뛰던 그의 아들이 운동장에서 쓰러져 급히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는데, 청천벽력 같은 진단명이 내려집니다. 의사는 존 큐 내외에게 아이가 당장 심장 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고 말해 줍니다. 문제는 엄청난 수술비용이었습니다. 믿고 있던 의료보험은 존이 정규직을 잃으면서 약관 변경 사유가 생겨 심장 이식과 같은 고비용 수술은 적용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무과장은 의료보험의 보장 없이는 아이를 심장 이식 대기자 명단에 올려 수술을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존 큐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그의 직장 동료와 지역 주민은 모금 운동을 벌이고, 그의 가족도 세간살이를 팔아 병원비에 보태지만, 목표액에 턱없이 모자랍니다. 수술비는 최소 25만 달러나 들고 수술 대기자 명단에 올리는 데도 75천 달러를 예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병원은 돈이 마련되지 않으면 당장 아이를 퇴원시키라고 통보합니다. 이에 존 큐의 아내는 무슨 수를 써봐요”(Do something!)라며 울부짖습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존 큐는 최후의 방법을 선택합니다. 아들이 수술받을 병원 응급실을 권총으로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입니다. 요구사항은 단 하나, 아들의 이름을 수술 대기자 명단에 올려달라는 것입니다. 여러 우여곡절과 경찰특공대가 존을 저격하는 데 실패한 뒤에, 아들 이름이 대기자 명단에 올라가자 존은 인질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다른 병동에 있던 아들을 응급실로 데려오게 합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합니다. “사랑한다. (아빠가) 항상 네 곁에 있을께.”

존 큐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놀랍게도 자기 심장을 떼어내 아들에게 이식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혈액형, 심장조직 등 모든 조건이 맞아야 심장 이식을 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존 큐는 이미 정밀진단을 받아 본 결과 모두 일치한다고 대답합니다. 또한 산 사람의 심장을 이식할 수는 없으니 자기가 자살하여 죽으면 그 심장을 떼어 이식해 달라고 합니다. 존의 놀라운 부성애에 감동한 의사는 심장 이식 수술을 준비시킵니다.

그제야 존은 권총에 탄환을 장전하고 응급실 수술대에 눕습니다. 그때까지 존 큐는 빈총으로 인질들을 위협했던 것입니다.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는 순간, 장기이식용 심장이 도착합니다. 마침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진 젊은 여자의 심장과 간과 폐 등의 장기들을 적출한 의료당국이 혈액형이 B+로 같은 존의 아들에게 이 여자의 심장을 이식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장이 내 속에서 뛴다!

이 영화에서 존 큐의 아들 마이크의 가슴 속에서는 아버지의 심장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심장이 뛰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가슴 속에서는 예수의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희생하심으로써, 죽어있던그러니까 비록 숨 쉬며 살아있어도 죽음의 세력 앞에서 숨죽이고 찍소리 못하며 죽은 듯이 살았던 우리가, 자기 소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세상 욕망을 좇아 살던 우리가 예수의 심장을 이식받고 다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존 큐가 아들 마이크에게 약속했듯이 하나님은예수 그리스도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 그리스도인의 심장은 예수의 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수의 심장을 이식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살아야지요. 이익만 보려 하지 말고 좀 손해 보며 살아야지요. 나누고, 낮아지고, 섬기며 살아야지요. 불의를 보면 못 본척하지 말고, 저항하면서 살아야지요. 약자를 긍휼히 여기며 살아야지요.

특히 존 큐가 어떻게 자기 아들을 살렸는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불의한 현실에, 잘못된 제도에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그것도 남을 희생시키지 않고, 자기가 희생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 저항과 희생이 결국 그의 아들을 살렸습니다. 하늘은 아무나 돕지 않습니다.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저항해야 개혁되고, 포기하지 않아야 언젠가 실현됩니다.

제가 오늘 2022년 부활절을 맞아서 이런 메시지를 선포하는 이유는 우리가 앞으로 살아내야 할 5년간,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윤 당선자가 하는 일을 보면 청와대 이전 문제도 그렇고, 총리와 장관 후보자들 인물 됨됨이도 그렇고, 그가 말하는 공정과 상식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눈치도 없고 염치는 더더욱 없습니다. 파렴치합니다. 우리는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서 살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잘못은 지적하고 불의에는 저항해야 할 것입니다.

저항은 당연히 십자가를 수반합니다. 고난이 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고난과 희생을 억지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존 큐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게 자식 살리고자 하는 부모 마음 아니겠습니까? 우리 자녀 세대가 살아갈 새 세상을 위해 우리도 존 큐처럼 기꺼이 저항하고 희생해야 할 것입니다. 그게 부활을 사는 길입니다. 부활은구원은 예수처럼 살 때 주어지는 특권이요 은혜입니다. 우리의 기꺼운 희생이 우리와 후손들에게 부활 세상을 선물할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되새기면서 잠시 침묵 가운데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