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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0년
제목 [8. 16] 차별을 넘어선 믿음 | 신연식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0-08-16
조회수 44
첨부파일
p200816_질그릇 1단.pdf



차별을 넘어선 믿음

 

21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22마침,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방에서 나와서 외쳐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23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간청하였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 24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25그러나 그 여자는 나아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26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27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28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15:21-28)

 

주님의 평화가 간절히 요청되는 이 때에,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기 모인 분들과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빕니다. 특별히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로 고통받는 많은 분들과 이번 수해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분들, 그리고 지금도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지만, 건강과 질병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이곳에 함께하지 못하는 많은 교우들께 하나님의 한없는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안타깝게도 지난 금요일 저녁 코로나19 확진자가 166명으로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서울시에서는 종교시설 집합금지명령 조치를 내렸습니다. 또 연이어 어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는 코로나19 대응단계를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로 한 단계 격상하였습니다. 아마도 확진자 중에 상당수가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고, 감염전파 속도 또한 매우 빠르게 전개되어 불가피하게 내려진 조치라고 생각됩니다만 마음은 무겁습니다.

지난 2월 중순에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한 후로 약 6개월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느새 마스크는 우리가 입는 옷과 같이 우리 신체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더 이상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도 시간이나 일정만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모임장소가 어디인지, 모이는 인원은 몇 명인지, 모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까지 고려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일상의 경제활동과 사회적 만남, 종교적 신앙생활 등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코로나19가 빨리 끝나서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이제는 지금의 모든 상황은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코로나19가 지금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게 큽니다. 우리가 이번 코로나19를 경험하게 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몇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 한가지는 코로나19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코로나19의 감염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고, 그 누구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잘 사는 사람이든, 못 사는 사람이든,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또 다른 한가지는 온 인류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만 건강하고, 나만 안전하게 잘 살면 돼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건강히 회복되어야 나의 안전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나라들에서 국경을 봉쇄하고, 경계를 강화하였지만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지 못했습니다. 또 코로나19의 완전종식을 선언한 국가들도 여전히 언제고 다시 시작될 위협 앞에 놓여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가 깨닫게 된 사실은 이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면서 모두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코로나19를 통해 발견한 인류공동운명체라는 자각과 달리 많은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이후(after corona)의 세계는 굉장히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며, 민족주의적인 사회인식이 확산될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자신에게 미칠지 모르는 위협과 공포의 원인을 외부로 돌림으로써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려 한다는 말입니다. 마치 강아지가 무서우면 자기가 먼저 으르렁거리고 짖는 것처럼,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낯선 것에 대한 배타적 행동과 이질적인 것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러한 일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14세기 중반에는 유럽인구의 3분의 1의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던 페스트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의 혐오와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일제식민치하였던 1920년에는 관동대지진의 원인을 조선인에게 돌려 수많은 조선인 학살했던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중국에서 우리 나라로 연이어 확산될 무렵 상당수의 우리 나라의 국민들은 모든 중국사람들을 마치 질병의 온상처럼 바라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사회에서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코로나19의 전염자 취급하며 무작위 폭력을 가했던 것도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안 그럴거야싶지만, 도 요즘 누군가 낯선 사람이 나에게 다가올 때, 황급히 마스크를 고쳐쓰고, 간단한 대답으로 응대한 후 자리를 피하는 경험을 하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물론 안전을 위해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요하고, 가급적 코로나 확산을 막고자 하는 예방적 차원에서 서로 조심하는 것이지만 그 기저에 깔려있는 우리의 사회인식은 점차 폐쇄적이고, 배타적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앞서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미친 영향 중에 배타적 사회인식에 대해서 길게 말씀드렸는데요, 그 이유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행동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성서일과의 본문은 마태복음 15장의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의 딸을 치유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고 또 읽어봐도 여간 불편한 본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행과 함께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갔을 때 그 지방에 사는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 여인에게는 귀신 들려 고통받는 딸이 있었고, 고침을 받기 위해 큰 소리로 부르며 간청합니다. 그런데 이 소리를 듣고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나서서 어떤 조취를 취해달라고 요청하자 예수님은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24) 하고 딱 잘라 거절합니다. 절박한 여인은 무릎을 꿇고 더욱 간절하게 간청을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6) 하는 모욕적 언사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거절을 너머 날벼락과 같은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제서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때 그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난 여러분의 느낌은 어떠셨나요? “아니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나?” “한번도 아픈 사람들과 연약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이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여인의 간청을 뿌리칠 수가 있지?” “그것도 굉장히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말로 거절할 수가 있어?” 누구보다도 다른 이들을 따뜻하게 배려하고, 다른 이들의 아픔을 마치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셨던 분이 예수님이 아니셨나? 우리가 알던 그 분이 맞나? 굉장히 낯선 예수님의 모습에 의문이 드셨을 것입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라고 지칭되었으니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본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정작 우리가 불편하게 느끼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가 불완전하고 편협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동안 그리스도교 신학 전통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분으로,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 그래서 하나님과 같은 분으로 고백하기에 예수님은 죄도 없고 흠도 없는 완벽한 분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오늘 본문은 이러한 생각과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화 과정을 통해 신적 이미지로 덧입혀진 색안경을 벗어야 합니다. 대신 당시 민중들과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며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쳤던 역사적 예수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본문이 말하는 그 깊은 뜻에 더 깊이 다가설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역사적 예수를 통해 참 인간됨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인 우리들의 성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신으로만 모시고 모든 것을 신에게 맡겨 버리는 것은 신앙인의 주체적인 삶을 방기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예수님은 나와 다른 존재니까’, 하거나 예수님이니까 그렇게 살지하는 자세를 취해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그럴 리 없어!’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인간 예수, 역사적 예수에서 보면, 본문이 전하는 초점이 다른 곳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는 로마 식민지배 아래 있는 팔레스틴 지방의 유대인이었고, 남성이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품고 하나님 나라 운동에 투신했던 예수님도 유대인 남성으로 태어나 나자렛 촌동네에서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온 인식적 한계에 매여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원래 유대교를 갱신하려는 유대인들의 운동이었으니 이방인 여인의 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 모든 인류의 권리가 존중되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오늘날의 눈에서 보면 예수의 발언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1세기 유대인 독자들의 눈에서 본다면 전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이방인을 대하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이 태도가 경계와 배척, 배제와 차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위대성은 그 유대인들을 위한 논리가 언제까지나 유대인들만을 위한 논리로 굳어지지 않고, 새롭게 제기되는 요청 앞에 무너지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26절에 나타난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6)는 말은 분명 모욕이었고 차별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욕적 언어와 차별적 태도를 무너뜨린 것이 바로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모욕을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관계는 단절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절박함이 자존심을 훨씬 뛰어 넘어섰던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이 모욕과 거절에 노여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딸의 고통으로 인해 겪어온 인고의 세월이 준 선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딸 아이의 고통 앞에서 어쩌면 이 엄마는 삶의 진리를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 그리고 그밖에 나머지 것들은 모두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사실. 내 자존심이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바로 이 지점이 여성들, 특히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고 살리는 일에 전문가인 여성들의 가장 강한 강점입니다.

 

주님, 그렇긴 합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27)”

       

여인이 말합니다. 겸손하지만 뼈 있는 이 한 마디에 녹아 있는 절규와 흐느낌과 간절함은 예수님의 편견과 차별을 무너뜨립니다. 사람이든 (당신들이 말하는) 개든 모두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빵이 필요한 것처럼 생명을 살리는데 경계가 어디에 있습니까? 유대인의 생명은 값지고, 이방인의 생명은 값지지 않습니까? 생명에는 구분이 없지 않습니까?’하는 충격적인 깨달음에 쇠망치를 맞은 듯 예수의 인식을 변화시킵니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문제에 몰두해 있던 유대인 예수님을 구체적인 한 존재, 곧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한 사람에게 주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28)

 

유대인의 편견에 머물러 있던 예수님의 인식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여인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 고통의 자리로 예수를 초대했고, 예수님은 기꺼이 그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그곳에 치유가 일어났고, 그곳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나안 여인의 간청에 예수가 보인 반응을 보면서 불편한 마음을 가졌지만 사실 우리들 사이에서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자신의 삶과 경험 속에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말들은,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자기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또는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상대방에게 모욕이나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남자는 남자의 입장에서, 여자는 여자의 입장에서, 어른은 어른의 입장에서, 젊은이는 젊은이의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그것은 불가피합니다. 그 사람이 자라고 경험해 온 인식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의 입장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것이 될 때 위험합니다. 그것은 곧 죽음의 논리가 됩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차별과 배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배제와 차별에 앞장서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안타깝게도 기독교인들입니다. 몇해전 내전을 피해 목숨을 건 여정을 통해 제주도에 시리아 난민들이 들어왔을 때도, 사회적 차별과 편견으로부터 최소한의 법적 보호를 받기 위한 차별금지법에도 가장 앞장서 반대하며, 혐오의 표현을 퍼붓고 있는 것이 기독교인들입니다. 그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신앙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생명살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가장 앞장서야 할 기독교가 자신의 신앙을 성결케 하기 위해 차별과 혐오에 앞장서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서두에 코로나19를 대응할 때 자신의 주위만 경계를 치고 봉쇄한다고 결코 안전할 수 없다고 말씀드린 것처럼 차별과 배제로 우리의 신앙이 더욱 깨끗해지고 신실해질리는 만무합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성별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정결법을 강조하며 지키며, 배제와 차별을 일삼았지만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해해보면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것은 나와 다른 무엇이 우리 안에 들어오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무엇을 보고 경계하고 표출하는 혐오와 차별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의 차별을 넘어선 믿음을 통해 예수님은 새로운 삶으로 향해 투신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한 마디로 수많은 경계를 가로지른 삶이라 하겠습니다. 의인과 죄인,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거룩함과 속됨 사이를 넘나들며 그 둘을 소통시키시려고 애쓰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1:14-16)

 

고통 앞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은 무의미했습니다. 마침내 주님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했고, 바로 그 순간 여인의 딸은 회복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익숙한 세계에만 머물지 말고 처음에는 불편하더라도 경계선 저편의 사람들에게 다가서보라는 주님의 초대 앞에 서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수많은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사람들을 소통시키고, 마침내는 그 경계선 자체를 없애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의 초청에 배제될 수도 없고, 배제되어서도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우리가 따라야 할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시대적 전환 앞에 놓여 있습니다. 건강과 안전, 우리의 신앙과 공동체를 위태롭게 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로 내 안에 미움과 혐오가 자라고 있지 않은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우리 주위를 둘러싼 경계를 끊임없이 허물고자 애써야 하며 우리를 가르는 담을 허물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의 인식과 통념, 편견과 아집이 우리의 눈을 가리워 생명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은 내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온전히 나를 개방할 때 차별과 편견, 배제와 경계를 내려놓을 때 고난당하는 생명이 보이고, 온전한 사랑이 가능해집니다. 이 신앙의 진리가 여러분의 삶에서 경험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