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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0년
제목 [8. 23]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0-08-25
조회수 55
첨부파일
p200823_질그릇 1단.pdf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1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2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3나는 내가 받은 은혜를 힘입어서, 여러분 각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 4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으나, 그 지체들이 다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5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각 사람은 서로 지체입니다. 6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우리는 저마다 다른 신령한 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의 정도에 맞게 예언할 것이요, 7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또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8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쓸 것이요, 나누어 주는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은 열성으로,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12:1-8)

 

바이러스에 테러를 당했다? 바이러스로 테러를 했다!

코로나192차 대유행으로 여러 가지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특별히 이번 대유행을 촉발한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가 개신교회여서 더 그렇습니다. ‘교회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말씀을 실현하는 생명의 터전입니다. 요즘같이 전염병이 창궐하는 비상한 시기에는 교회도 자신이 전염병 확산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교회의 각종 예배와 모임은 바이러스가 퍼지기 쉬운 소위 3()밀집, 밀접, 밀폐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더 철저히 방역해야 합니다. 기 공동체 구성원을 지키기 위해서도 그렇고, 본의 아니게 남의 생명을 위협하는 바이러스의 전달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코로나19 1차 대유행의 도화선은 신천지 대구교회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신천지는 정통 교회가 아니고 이단교회다라고 하며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개신교회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매우 차가웠습니다. 국민이 보기에 신천지교회나 개신교회나 오십보백보였기 때문입니다. 애석하게도 그 견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이번에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아니 이번 사랑제일교회 사태는 신천지 대구교회 사태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이미 신천지 사태를 경험하고도 고의로 방역을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이만희 교주는 대국민 사과라도 했지, 전광훈 목사는 사과는커녕 신문에 광고하고 기독교인을 선동했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자기들이 방역을 철저히 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을 불순분자들의 바이러스 테러 사건이 우리 교회에 일어났다고 가짜 뉴스를 퍼뜨린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사랑제일교회가 바이러스에 테러를 당한 것이 아니라, 사랑제일교회가 바이러스로 전 국민을 테러한 것 아닙니까? 보도에 따르면 이번 8.15 광화문 집회 참가자들에게 주의사항이라며 다음과 같은 공지가 돌았다고 합니다.

 

8.15 시위참가자들은 위치추적방지를 위해 반드시 출발 전 핸드폰 전원을 끄고, 신용카드 사용은 절대 금지. 가능한 현금을 사용해서 확진자 동선 파악이 안 되도록 철저하게 긴장하고 움직여야 함.

 

사랑제일교회에서 확진자가 발생한 것은 지난 12일부터입니다. 그런데 검사를 미루고 15일 집회에 참석하라고 독려했습니다. 더구나 집회 참석 사실을 숨기려고 휴대전화를 끄고 신용카드 사용도 금했습니다. 이것이 바이러스 테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사랑제일교회는 바이러스에 테러를 당한 것이 아닙니다. 바이러스로 전 국민을 테러한 것입니다. 그 수괴는 바로 전광훈 목사이고, 그런 괴물을 잉태하고 성장시킨 온상은 바로 극우 반공주의 한국 개신교회입니다. 또한, 주류가 아닌 비주류였던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아스팔트의 구세주, 태극기 부대의 메시아로 만든 주범은 바로 지금의 보수 야당입니다.

 

한국 개신교회의 재건

그렇다고 우리 개신교회가 아무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 코로나19가 재확산 되고 정부가 190시부터 수도권 모든 교회에 예배 및 집회를 금지한다고 발표하자 기장 서울노회장 명의로 짧은 공지가 왔습니다. 그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코로나19가 재확산 된 것에 교회가 이 땅에 책임 있는 삶을 다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며, 이 상황이 엄중함을 자각, 자숙하며 기도를 요청드립니다.” 지당한 권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5: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직설법으로 되어 있는 이 말씀은 사실은 초대이고 명령입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보다 잘 요약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소금처럼 자기를 녹여 부패를 막고 또 맛을 내는 것, 자기 속에 있는 기름을 태워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것, 그것이 하나님 백성들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기는커녕 세상에서 마약과 어둠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를 양산한다면서 실제로는 기독교 환자만 양산해 왔습니다. 우린 이 엄연한 현실을 하나님과 국민 앞에서 통회하고 자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무늬만 기독교인 가짜 기독교와 결별하여 한국 개신교회를 재건해야허물고 새로 지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적 구원의 길

마침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11장에서 구원의 도()’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12장부터는 그 구원의 도를 실천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 둘 것은, 이제부터 전개되는 바울의 말씀은 이렇게 살면 그 대가로 구원을 받는다라는 게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권면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안 됩니다. 언제나 우리의 믿음이나 실천보다 하나님의 은총이 먼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나 실천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자발적인 응답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발적인 응답을 끌어내는 하나님의 은총은 무엇일까요? 쉽고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인데,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분배적) 정의입니다. 인간이 대가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은총으로 체험하면, 그 은총에 감격하여 믿음과 실천으로 자발적인 응답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길입니다. 그래서 은총은 구원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인간의 믿음과 실천이 합쳐질 때 비로소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구원은 하나님이나 인간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누누이 설명한 참여적 종말론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구원은 이 죄악 세상에서 의인을 픽업(pickup)해서골라내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죄악 세상에서 악과 죄를 대청소해서 보시니 참 좋았다고 하신 창조의 원상태를 회복하는 것, 저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을 천국 만드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거룩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선교에 아무 자격이 없는, 턱없이 부족한 우리도 감히 동참할 수 있도록 선뜻 기회를 주신 것이 바로 은혜이고, 이 은혜에 자발적으로 응답해서 하나님의 세상 대청소를 돕는 것에서 세상과 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세상 대청소에 참여하면서 원래 정의롭지 못했던 내가, 사랑이 부족했던 내가 어느새 정의롭게 변화되고 사랑이 많게 변화되는 것, 그리고 그 선한 영향력을 주변으로 확산시켜 세상과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개인의 구원을 포함하지만, 결코 개인만의 구원일 수 없습니다. 개인과 공동체 둘이 있다면, 개인보다는 오히려 공동체에 구원의 중점이 있습니다. 공동체의 구원 없이 개인의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은 이를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은 태초에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우리그리스도인이나 교회가 아닙니다. 이점을 헷갈리면 안 됩니다. 헷갈리면 큰 낭패를 봅니다.

 

대신속죄가 아닌 참여하는속죄

요즘 제가 역사적 예수의 도전이란 제목으로 성경공부 특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주 수요일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든 안 하든 서울제일교회 교인이면 누구나 YouTube에 올려놓은 강의 동영상을 시청하고 계실 줄 믿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4예수의 죽음을 공부했는데, ‘대속이 논란이었습니다. ‘대속대신 속죄의 준말입니다. 저는 속죄는 성경적 개념이지만, ‘대속은 결코 성경적 개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동의하시는 분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분도 있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우리는 속죄했다라는 말과 예수의 죽음은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한 것이다라는 말은 비슷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둘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대속, ‘대신속죄는 예수님이 모든 문제를 혼자서 다 해결하셨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은혜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우리의 자리는 없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셨기에 우리는 끼어들 여지는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협동도 인간의 참여나 동참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셨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공짜로 구원 열차를 타고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가 이를 잘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결국 대속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 ‘현세가 아니라 내세’, ‘창조 세계 전체가 아니라 인간’, 그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인’, 그리고 참여가 아니라 불참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교 전통인 참여적 종말론이나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는 결코 함께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대속 신학은 하나님을 봉건 군주로 생각했던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무스의 착각과 아무런 노력과 희생 없이 공짜로 구원을 얻으려는 인간의 이기심이 합작해 낸 나쁜 신학입니다.

그렇다면 대신 속죄가 아닌 다른 속죄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최초로 속죄와 연결해서 해석한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그것이 바로 참여하는 속죄라고 말합니다. 본문 1절을 보시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as a living sacrifice)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인(합당한, spiritual) 예배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우리 몸을,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합니다. 대속 신학에 따르면 이 권고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몸을 십자가상에서 제물로 이미 바쳤는데, 그래서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다 해결되었는데 왜 우리가 다시 제물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예수님만이 아니라 우리도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에게는 대속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렇습니다! 대신 속죄는 없습니다. 바울에게 속죄는 예수님의 속죄에, 즉 십자가의 도를 통해 하나님과 (다시) ‘하나가 되는’(at-one-ment) 길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범을 좇아 우리도 예수님처럼 제물이 되는 속죄에, 참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몸을,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제물로, ‘living’ sacrifice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살아있는 제물살아있는 주검이란 말처럼 이상하게 들립니다. 원래 제물은 죽여서바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와 다르게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양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면 양이 제물입니다. 그런데 양은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칠 능력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양과 다릅니다.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칠 수도 있고 바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단에 바쳐진 제물은 이미 자신의 몸과 함께 자유 의지를 하나님께 바쳤기에 더는 살아있는 목숨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숨지는 순간까지 언행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쉬지 않고 생각하며 말하며 행동했습니다. 자기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래서 예수님은 제물이었지만 죽은제물이 아니라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죄의 길을 뒤쫓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길을 택했기에 우리 역시 죽은제물이 아니라 제물입니다. 특히 우리의 경우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에 제물입니다. 이를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에게 바쳐진 산 제물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살과 피가 흐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몸을 하나님께 바쳐서, 죽은 몸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바쳐야 하는 진정한 예배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의 삶은 그 자체가 거룩한 예배/영적인 예배입니다.

 

새롭게 변화를 받아서

본문 2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몸을, 삶을 하나님께 선물로 바치는 희생제물(sacrifice)로 내놓은 결과는 변화와 새로움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여기서 우리가 본받지 말아야 하는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세계가 아닙니다. 그 세계는 선합니다. “이 세상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처럼 이 세상의 지혜에 따라 조직된 세상, 사람들이 만든 세상으로서, 지배, 불의, 분열, 폭력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제국의 세상(world of imperial normalcy)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에 이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마음”(mind)은 우리의 생각하는 기능, 지적이며 이성적인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보다 종합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세상과 인생을 보는방식을 가리킵니다. 개인적인 변화에는 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 변화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런 변화와 새로움의 결과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능력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시대)의 풍조를 본받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비록 세상 속에서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해서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의 풍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살아야 합니다. ? 우리는 이미 나에 대해서세상에 대해서 죽은제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살고 있기에 우리의 주인인 그리스도를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변화의 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함께 부활하는 길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바울은 요한복음의 선언, 즉 예수가 ”(the Way)이라는 선언(14:6)에 동의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예수 안에서 본 속죄의 길,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at-one-ment) 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길을 함께 걷자고,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그리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 초대에 응답해 비록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새롭게 변화를 받아서 세상과 다르게 사는, 그래서 결국 다른 세상을 만들어 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