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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0년
제목 [8. 30]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0-08-30
조회수 33
첨부파일
p200830_질그릇 1단.pdf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9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10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11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12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13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14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15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16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 17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18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19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하였습니다.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하였습니다.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12:9-21)

 

통렬하게 참회합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뉴스를 보고 들을 때마다 매우 속상하셨지요? 어떤 분은 속상한 것을 넘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고 하시더군요. ‘사랑제일교회광화문집회로 인한 코로나 확산 사태와 의사 파업 사태가 우리의 속상함울화의 주원인이었습니다.

이 두 사태로 인해 일반 국민은 개신교인의사를 싸잡아 욕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모든 개신교인과 모든 의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억울한 점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나는 그렇지 않다는 하소연이 아닙니다.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진심 어린 참회입니다. 마침 지난 24일 월요일에 우리 교단 총회장께서 이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셨기에 좀 길지만 몇 줄 인용하고자 합니다.

 

코로나19 감염사태는 멈추어 서서 돌아보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라는 하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가 멈추어 선 동안에도 욕망의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복음을 전파해야 할 교회는 도리어 코로나19의 슈퍼전파자가 되어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향한 분노와 아우성 속에서 하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희가 결코 세상보다 이타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합리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다는 준엄한 꾸짖음을 듣습니다. 참담하고 부끄럽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세상 앞에 미안합니다. 회개로 무릎을 꿇고 참회로 엎드립니다. 극우적 정치이념과 근본주의적 믿음이 결합한 전광훈 현상은 한국교회의 민낯이었습니다. 분단체제에서 화해의 가교가 되어야 할 교회가 대결과 증오를 부추겼습니다. 극단적 혐오와 막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전광훈 현상은 이 엄중한 시기에 국가적 방역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습니다.... 한국교회는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즉각 전광훈 목사와의 관계절연을 선언하고, 그를 교계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전광훈 현상을 배태하고 비호하거나 또는 방관해온 그동안의 한국교회의 잘못을 통렬하게 참회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나무인가?

구구절절이 다 옳은 말씀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전광훈의 퇴출이 아니라 전광훈으로 대표되는 예수 없는 한국교회의 퇴출에 관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7:18b)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전광훈이라는 나쁜 열매가 열린 이유는 한국교회가 나쁜 나무였기 때문입니다. 그 나무를 그대로 두면, 거기서 열리는 것은 제2, 3의 전광훈일 뿐입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습니까?”(7: 16b) 따라서 하나님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쁜 나무를,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입니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니, 우리 국민은 예수 없는 한국교회를 우리 사회에서 퇴출할 것입니. 이미 그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20208, 한국에서 개신교는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자칭 “28년 모태 신앙인이 쓴 기사가 그 생생한 증거일 것입니다.

보수교회가 그렇다면 우리 진보교회는 어떻습니까? 저들이 예수 없는 기독교, Christianity without Jesus”라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안에는, 우리 교회 안에는 과연 예수가 존재합니까? 제가 예수라고 물었습니다. ‘그리스도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 ‘예수그리스도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역사를 살았던 한 인물이고, ‘그리스도그 인물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여러분은 저를 정원진 목사라고 부릅니다. ‘정원진은 제 이름이고, ‘목사는 저를 부르는 호칭/칭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그리스도라는 뜻이고, “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승인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달리 설명하면 예수는 사람을 가리키고, 그리스도는 신격화된 존재를 가리킵니다. 당연히 신앙의 그리스도이전에 역사적 예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2천 년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만 남고 뿌리인 예수는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 “당신이 믿는 그리스도교 안에 (신앙의) 그리스도는 있는데, 과연 그 뿌리인 (역사적) 예수도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저는 한국 개신교회는, 보수교회는 물론이고 진보교회도, “예수 없는 기독교에 속한다고 봅니다. 제가 알기로 역사적 예수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는 신학교는 없습니다. 선택과목으로 들을 수 있는 학교도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성경공부 시간에 역사적 예수를 가르치는 교회는 천연기념물처럼 희귀합니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아무튼 저는 진보교회가 다 좋은 나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나무기는 한데, ‘잎은 무성한데 열매는 없는 나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11:13 참조). 예수님은 가시나무와 엉겅퀴만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도 책망하신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당연히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되도록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배 생활이 아닌 생활 예배

오늘의 본문 말씀은 지난 주일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지난 주일에 바울은 우리가 오해한 것과 달리 대신 속죄가 아니라 참여하는 속죄에 대해서 말했다고 했습니다. 예수 죽음의 의미를 다루는 속죄는 원래 분열이나 불화, 소외된 상황을 전제합니다. 둘 사이의 분열이나 불화나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어떻게 갈라진 둘 사이를 화해시킬 것인가? 이것이 속죄의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속죄는 화해의 수단을 가리킵니다. 속죄가 영어로 ‘atonement’인데, 그 원뜻은 ‘at-one-ment’, (다시) “하나 됨입니다. 하나님과 (다시) 하나 됨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하나 됨을 가져오는가? 여기서 예수의 십자가는 무슨 역할을 하는가? 이것이 바로 속죄의 교리입니다.

바울은 그 답을 로마서 121절에서 분명하게 밝힙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바울에게 속죄는 결코 대신 속죄가 아닙니다. 바울에게 속죄는 십자가의 도()를 통해 하나님과 (다시) ‘하나가 되는’(at-one-ment) 길을 보여준 예수의 모범을 쫓아 우리도 예수님처럼 스스로 제물이 되는 속죄의 길에 참여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참여를 마지 못해 억지로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기꺼이합니다. 그래서 제물이기는 하지만, ‘죽은 제물이 아니라 산 제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합당하고, 영적이고, 진정한 예배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지금 예배 생활생활 예배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옛날 아모스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5:21-24)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불의하게 살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 드리는 예배는 역겹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는 소용도 없고 받지도 않겠으니 다 집어치우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정의 없는 예배 생활은 필요 없으니, “사랑과 정의가 넘치는 삶을 살아라, 생활 예배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인간의 자기만족을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국에 대면 예배만이 참 예배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에 근거한 것입니까?

 

서로 지체

로마서 121절에서 예배 생활이 아니라 생활 예배를 강조한 바울은 이하 12장 전체를 통해서 무엇이 생활 예배인지를 아주 세세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당장 2절에서 바울은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이 말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는 것이 생활 예배라는 말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도 생활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도 생활 예배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12장 전체를 이런 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나아가 읽은 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예배 생활에서 생활 예배로의 전환이 가능합니다. 로마서 12장은 생활 예배를 설명한 서술문이 아닙니다. 그대로 살라는 명령문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기꺼이 살아낼 때,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2절부터 21절의 말씀은 허투루 읽으면 안 됩니다. 죽은 문자가 아니라, 나를 먹이고 살리는 생명의 양식으로 알고, 한 절 한 절 마음에 아로새기고, 한 절 한 절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시간 관계상 12장 전체를 그런 식으로 풀이할 수는 없고, 몇몇 구절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중 하나는 (지난주일 본문에 포함되었던) 5절입니다. “이와같이, 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각 사람은 서로 지체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몸과 지체로 설명하는 중에 바울은 우리가 서로 지체라는 말합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이 예수님의 뒤를 이은 하나님 나라 운동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교회, 즉 에클레시아 안에서의 공동체 생활로 이끌었습니다. ? 세상 전체를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기에 앞서, 교회 공동체를 먼저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고 그것을 세상 속에서 널리 분산하고 점점 확장하는 것이 그의 선교 전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단기 목표는 성도의 구원이지만, 장기 목표는 세상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서로 지체는 당장은 교회 안에서 성도끼리의 관계를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피조 세계 모든 사람의 관계, 아니 사람을 넘어선 모든 피조물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바울은 그 관계가 서로 지체라고 합니다. “너 없이 나 없고, 나 없이 너 없는 관계, 서로 상생(相生)하는 유기적인 관계가 그것입니다. 앞서 예배는 인간의 자기만족(=자족)을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생활 예배를 살아가는 성도는 홀로 자족한 사람이 아닙니다. 값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은 사랑의 빚을 진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별명은 덕분네

그렇기에 성도의 삶은 사랑의 빚 갚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직접 주시지 않습니다.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주십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아버지를 통해서, 스승을 통해서, 다른 고마운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잠시 어떤 천사들이 여러분의 인생길에 머물렀었는지 떠올려보십시오. 내가 얻을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기에 앞서,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 그런 이가 바로 천사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돌려 받으려는 마음 없이 남에게 줄 때, 은 하나님께 드림이 됩니다.

언젠가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이 성도의 별명은 덕분네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덕분네는 늘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옳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덕분에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살았고, 우리 인생에 동행한 여러 천사들 덕분에살았습니다. 비틀거릴 때마다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고, 외롭고 슬플 때 곁에 머물러 준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덕분입니다라고 감사하며 삽니까?

우리가 진정 덕분네가 되어 인생이 고마움임을 아는 사람이 되면, 우리는 이제 누군가의 천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의식하지 못해도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누군가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살맛을 불어넣기를 기원하게 됩니다. ? 남들 덕분에살아왔으니, 받은 만큼은 아니어도 이제 조금이라도 남에게 덕을 끼치며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살고, 덕을 끼치며 살고, 이렇듯 서로가 서로에게 지체가 되는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렇듯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은 이들은 다른 사람의 필요에 응답하는 사람이 되라는 요청 앞에 서 있습니다. 필요에 응답한다는 것, 누군가의 지체가 된다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9절에서 바울은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이하 나머지 모든 권고는 덕분네로서 누군가에게 서로 지체가 되어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라는 말들입니다.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그런데 바울은 본문 14절에서 우리가 사랑의 빚을 갚으며살 범위를 악한 사람에게까지 확장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물론 이 말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5:44)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변형시킨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을 거두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를 위해 축복한다는 것은 감정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입니다. 왜 사도는 이 어려운 일을 하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게 결국은 자신을 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보면 박해를 받지 않고서 성장하고 성숙한 종교는 없습니다.    

박해는 괴롭고 아픈 것이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입에 쓴 약입니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지금 고통을 주고 있는 저 박해자는 내 인격과 신앙의 성숙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진실을 깨달으면 박해자를 저주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위해 복을 빌고 기도할 따름입니다. 물론, 지금 나를 박해하고 있는 자들의 생각과 행위를 정당하게 여기라는 말은 아닙니다. 저들은 분명히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몰라서 그런다고 해도, 무지(無知)도 죄악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참으로 역설입니다. 박해자는 지금 자신의 무지와 범죄로 나의 성숙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저들의 공()을 인정하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저들의 과()가 우리의 성장과 성숙에 도움이 되었고, 또 되고 있다는 역설을 깨닫고 저들을 위하여 복을 빌어주자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박해자는 자신의 무지함으로 나의 성숙을 돕는 사람이니 그를 위해 복을 빌어주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고 마지막으로 권고합니다. 이 증언을 준비하면서 찬송가 510장이 떠올랐습니다.

 

죄의 밤은 깊어가고 성난 물결 설렌다 어디 불빛 없는가고 찾는 무리 많구나

우리 작은 불을 켜서 험한 바다 비추세 물에 빠져 헤매는 이 건져내어 살리세

 

우리는 이런 소명 앞에 서 있습니다. 죄의 밤은 깊어가고 성난 물결이 일렁이는 세상에서 길을 잃은 이들이 많습니다. 아니 우리 개신교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길을 잃었습니다. 작은 불이나마 밝혀야겠습니다.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소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해야 할 일이기에 하는 것입니다. 죄의 밤이 깊어갈수록, 악이 기승을 부릴수록, ‘예수 없는 기독교속에서 뿌리 예수를 찾아내 굳건히 붙들어야 합니다. ‘덕분입니다진심으로 감사하고, ‘받은 덕을 나누며살아야 합니다. 박해자도, 행악자도 축복하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요, 생활 예배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