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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0년
제목 [9. 6]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0-09-06
조회수 26
첨부파일
p200906_질그릇 1단.pdf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8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9"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10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11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3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14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13:8-14)

 

이름값 하면서 살기

9월이 되면서 성령의 계절창조의 계절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 계속해서 로마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좀 더 구체적 말하면 이웃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이웃 사랑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사랑제일교회가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이름대로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명학이 그렇게 주장합니다. 이름이 수없이 불리고 사용되면서, 그 이름에 따른 이미지가 생성되고 에너지도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나 에너지는 그 이름의 주인공에게 밤낮으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이름이 그 주인공의 운명을 견인하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고민을 참 많이 합니다. 특별히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서 이름을 짓습니다. 그런데 이는 사람 이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건이나 단체의 이름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사랑제일교회라는 이름도 그렇게 지어졌을 것입니다. ‘사랑을 제일의 가치로 삼는 교회’, ‘사랑이 제일 많은 교회등등의 소망을 담아서 교회 이름을 사랑제일교회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그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사랑제일교회 발 코로나19 확산사태가 벌어졌을 때 우리 국민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기독교가 이웃을 사랑하지는 못할망정, 이웃에게 큰 피해를 주고, 이웃을 파산하게 하고,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내몰 수 있는가? 그러고도 사과하기는커녕 어쩌면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있는가?” 국민이 보기에 저들은 사랑 전달자가 아니었습니다. ‘코로나 전파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이름도 사랑제일교회가 아니라, ‘코로나제일교회라고 바꿔 불러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랑제일교회만의 문제일까요? 우리 서울제일교회는 예외일까요? 코로나에 대해서 당연히 우리는 사랑제일교회와 다릅니다. 하지만 제 질문은 코로나에 관해서가 아닙니다. ‘이웃 사랑에 관해서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름값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뉴스앤조이>라고 하는 복음주의권 인터넷신문이 있습니다. 최근에 강도현 대표가 교회 아닌 것들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발행인의 글을 발표했는데, 그 일부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전광훈 씨가 거칠어서 그렇지 그가 말하는 내용은 다 옳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의교회 부목사라는 분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그런 주장을 하시더군요. 메시지가 옳으니 메신저를 공격하는 것이라고요. 이렇게 말하는 분들을 정통 대형교회 목사나 장로 중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전광훈으로 표면화한 문제는 일부 극단적인 자들의 일탈이 아닙니다. 한국교회 전반에 펴져 있는 문제입니다. 전광훈 씨의 막말이 문제라고요? 그 내용이 훨씬 더 큰 문제입니다. 거의 망상에 가까운 주장을 옹호하는 일부 주류 개신교와 전광훈은 한 쌍입니다. 전광훈을 통해 드러난 것은 한국교회 민낯일 뿐입니다.

대면 예배가 목숨과 같으니 이해해 달라는 교회의 모습에 사람들은 냉소를 보냅니다. 교회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상도 압니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걸요. 한국교회를 향해 도대체 이웃 사랑은 무엇인지 세상이 묻고 있습니다. 비상식적이고 망상에 가까운 이데올로기 논쟁을 벌이거나 특정 집단을 배제하며 힘을 과시하는 교회가 아닌, 가장 낮은 곳에서 어두움을 밝혀내는 교회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교회가 엄청난 변화를 겪으리라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철 지난 이데올로기나 특정 집단에 반대하는 것으로 교회의 동력을 유지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이웃과의 소통과 사회를 향한 공감 능력이 좋은 교회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교회의 위기라는 말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교회가 위기에 빠진 적은 없습니다. 교회가 아닌 것들의 위기일 뿐입니다. 코로나 시대가 역설적으로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교회 아닌 것들이 더 확실하게 드러나고, 교회의 본질인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일어나리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고대하는 부흥입니다. 다행히 우리 곁에는 그런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 서울제일교회가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드러날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그런 교회중 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직업(Job)이 아니라 소명(Vocation)

이웃 사랑과 관련하여 그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의사였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이번에 있었던 의사 파업사태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병원에서 원목으로 일했을 때, 처음에 든 생각은 “(병원이란) 세상에는 단 두 종류의 사람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사의사 아닌 사람.’ 병원은 크게 진료부와 행정부로 구분되는데, 행정부 소속 직원은 물론이고, 진료부 소속 간호사 같은 의료진까지도 의사가 아닌 사람으로서 다 똑같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양반과 상놈으로 구분된 신분제 사회와 비슷했습니다. 특히 젊은 의사일수록 의사라고 하는 자기 직업에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엘리트 의식의 발로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기에 그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듯했습니다.

조금 지나니 그렇지 않은 의사가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륜이 쌓이고, 직책과 직급이 높을수록 겸손한 의사가 더 많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의사라고 다 같은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련병원의 의사 직급 체계가 전공의’(인턴과 레지던트)전문의’(임상강사와 교수)로 나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제 구분은 소의(小醫), 중의(中醫), 대의(大醫)’입니다.

병원에서 일하다 보니 어디선가 우연히 소의(小醫)는 질병을 고치고, 중의(中醫)는 사람을 고치며, 대의(大醫)는 국가와 사회를 고친다라는 격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국가와 사회를 고친다는 대의(大醫)는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 같은 의사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또 예전에 우리나라에 전국민 의료보험제도를 만드는데 앞장섰던 장기려 박사 같은 의사를 떠올리시면 될 것입니다. 소의(小醫)와 중의(中醫)의 구분은 현대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엄 오슬러(William Osler)가 했다는 말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훌륭한 의사는 병을 치료하지만, 위대한 의사는 환자를 치유한다.” 베스트셀러 그 청년 바보 의사라는 책의 주인공인 안수현 선생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표적인 사람 고치는 의사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게 소의(小醫), 중의(中醫), 대의(大醫)’에 대해 알려주셨던 홍창의 장로님(국내 소아심장학의 태두,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장 및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초대 이사장 역임)은 이 셋 이외에 악의’(惡醫)도 있다고 했습니다. 악한 의사, 나쁜 의사 말입니다. 악의는 도 아니고, ‘환자도 아니고, ‘에만 관심하는 의사를 가리킵니다.

저는 이번 의사 파업사태가 우리나라 의사들이 어떤 의사들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영어로 직업을 뜻하는 단어로 ‘Job’‘Vocation’이 있습니다. ‘Job’‘Vocation’소명’, ‘나 중심너 중심’, ‘physician oriented heart’ ‘patient oriented heart’, ‘이기적이타적등으로 구별됩니다.

모든 의사는 의대를 졸업하면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합니다. 그 첫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그렇습니다! 의사는 자기 직업을 통해 인류에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술(醫術)을 통해 인술(仁術)을 베푸는 의사를 존경하고 존중합니다. 그런데 의사가 스스로 자기 소명을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전락시킨 것 같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이번 의사 파업사태를 경험하면서 소명은 사라지고 직업만 남는 현실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소명 없는 목사, 또는 소명에서 멀어진 목사를 가리켜 사람들은 먹사라고 부르며 조롱합니다. 이웃 사랑이라는 사명에서 멀어진 기독교를 사람들은 개독교라고 비하해서 부릅니다. 우리 개신교회는 만인사제론’(萬人司祭論)을 주장합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고도 가르칩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은 자기 직업을 통해 소명을 실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소명은 사라지고 직업만 남았습니다. 직장과 직업은 단지 돈을 버는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래서 연봉의 많고 적음에 따라 좋은 직장과 그렇지 않은 직장, 좋은 직업과 그렇지 않은 직업을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직장과 직업이 단지 돈으로만 평가되면, 소명은 사라지고 사람도 사라집니다. 직업을 통해 자기를 실현할 길이 막혀버립니다. 그러면 욕구불만을 다른 것에서 찾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13절이 언급한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등입니다.

이렇듯 직업을 job으로 여기느냐 아니면 vocation으로 여기느냐고 하는 직업관첫 단추에 해당합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이후 나머지는 다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돈만 벌기 위해 일합니까? 아니면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보람을 느끼고 긍지도 갖습니까? 자기 job을 통해 vocation을 실현합니까? 사실 우리 job이 무엇이든, 주부든 은퇴자든 내가 무슨 일인가는 할 텐데, 그 일이 나만을 위한 것인가요 아니면 남을 배려하는 일인가요? 남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나는 지금 내가 손가락질하는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요?

결국, 문제는 무엇이 중심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제일교회 사태, 의사 파업사태도 다 누가 중심에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 중심에 나만 있으면, 이웃은 밀려나 눈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자기만 사랑하면 이웃 사랑은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기적인 생활 태도는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는 잘사는 길이 아닙니다. 결국은 너도나도 공멸(共滅)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을 생각하며, 저에게 세 번째로 떠오른 것은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현실이었습니다.

 

창조절에 생각하는 기후 위기

마침 오늘부터 창조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창조절은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하신 창조 질서의 회복을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를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의 주제는 이제껏 살펴보았듯이 이웃 사랑입니다.

지금 인류는 예전에 겪어보지 못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코로나19의 대유행과 역대 최장기간을 기록한 장마로 인해 전국에 걸쳐 발생한 홍수와 산사태, 그리고 계속 오는 초강력 태풍 등으로 인해 우리는 그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제 기후 위기는 강 건너 불이 아닙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발등의 불이요, 우리 일, 우리 위기입니다. 그런데 이 위기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바로 인류의 욕망 때문이 아닙니까? 더 편리하게, 더 풍족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이 지금의 사태를 불러오지 않았습니까?

지난 7월 초에 유엔 환경계획과 국제축산연구소는 팬데믹 예방: 동물성 질병과 전염병 사이의 고리를 끊어내는 법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첫째, 최근 50년 동안 유행하고 있는 전염병의 약 75%가 동물에게서 옮겨 온 전염병(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는 점입니다. 둘째, 이렇게 동물에게서 옮겨 온 전염병이 많아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인류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지적했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공장식 대규모 농장과 축산을 비롯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무분별하게 자연을 파괴한 결과 야생 동물이 살 곳이 적어졌고, 그래서 인간과 야생 동물과의 접촉이 더 높아지게 됐습니다. 인간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서 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자 인간과 동물의 접촉이 크게 늘었고, 이로 인해 동물 유래 전염병이 빈번하게 된 것입니다. 코로나19는 이런 동물 유래 전염병의 지극히 단편적인 일부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일부만으로도 인류는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음을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생태계 파괴는 대단히 많은 생물을 멸종 위기로 몰아넣고 지구 온난화를 가속해왔습니다. 50일을 훌쩍 넘긴 장마와 홍수를 잇는 폭염에서 엿볼 수 있듯이 한반도를 강타하고 있는 기후 이변, 그리고 호주, 미국, 아마존 등 세계 여러 곳에서 빈번해진 대형 산불과 영구 동토층의 해빙은 지구 온난화가 가져올 수 있는 결과 중 극히 일부입니다.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1의 기온 상승이 가져온 상황일 뿐, 이대로 가면 2050년에는 3이상의 기온 상승이 예상됩니다. 이 작을 것만 같은 기온 상승은 지구를 새로운 균형 상태로 몰아갈 것입니다. 이 새로운 균형 상태는 지구 생물의 95%를 멸종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치명적이고 낯선 균형입니다. 기후 위기가 다가오는 속도는 인간 문명이 자신을 성찰하는 속도보다 빠릅니다. 이 속도가 기후 변화를 기후 위기로 고쳐 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이 위기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처럼 실로 심각합니다. 지금처럼 계속 살면 파멸은 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멈추어야 합니다. 이번에 코로나19로 사람들이 멈추니 자연이 살아나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달리면 나만 보이지만, 멈추면 이웃이 보입니다. 그 이웃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창조 세계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21세기 이웃 사랑은 생태정의의 실천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내 편리, 내 풍요 추구를 멈추고, 이웃을 돌아보십시오. 나만 배려하지 말고 그들도 배려하십시오. 그래야 나도 살고, 이웃도 살고 함께 다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를 위하고, 우리 자녀를 위하고, 우리 모두와 지구 생태계 전체를 위하는 길입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길,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의 자세입니다.

마침 오늘 정시영 집사가 소원이라는 노래를 찬양으로 불렀습니다. 이 곡은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라는 곡으로 잘 알려진 <꿈이 있는 자유>라는 CCM 듀엣의 곡입니다. 이 듀엣은 곡도 잘 쓰지만, 가사가 참 좋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두 구성원 모두가 감리교 목사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소원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삶의 작은 일에도 그 맘을 알기 원하네

그 길 그 좁은 길로 가기 원해

나의 작음을 알고 그분의 크심을 알며

소망 그 깊은 길로 가기 원하네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여기 오름 직한 동산이 되길

내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내가 노래하듯이

또 내가 얘기하듯이 살길

난 그렇게 죽기 원하네

삶의 한 절이라도 그분을 닮기 원하네

사랑 그 높은 길로 가기 원하네

사랑 그 좁은, 그 깊은 길로 가기 원하네

 

이 가사처럼 내가, 우리가, 그리고 우리 서울제일교회가 예수를 알고,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살아내기를 소원합니다. 특히 말로만 사랑하지 않고, 자기가 말한 대로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단한 일은 못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은 최선을 다해서 성취할 수 있기를 빕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길이 비록 높고, 좁고, 깊기에 가기 힘들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