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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1년
제목 [4. 4] 부활을 확신하십니까?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1-04-06
조회수 41
첨부파일
p210404_질그릇 1단.pdf



부활을 확신하십니까?

 

11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흰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다. 13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4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15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17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18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20:11-18)

 

부활은 역사적 사실인가?

오늘 우리는 2021년 부활절을 맞이했습니다. 아직 코로나19가 유행 중이라 불안하고, 또 방역 지침을 철저히 지키느라 교회에 나와서도 1층 예배실과 2층 상상뜰 및 서제뜰로 흩어져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들을 마주 대하니 너무 반갑고 감사합니다.

코로나19는 정말 많은 것들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이전에는 당연하던 것들이, 지금은 특별합니다. 덕분에 왜 바울이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는지 우리 모두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여 있습니다. 코로나19가 다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일상의 변화 가운데 뉴노멀(new normal)’로 자리 잡은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유튜브’(YouTube)’(Zoom)입니다. 외출이 줄고 대면이 어려워지니, 많은 곳에서 유튜브을 활용합니다. 우리 교회도 예배와 성경공부, 각종 회의와 심방에 유튜브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유튜브가 보편화하면서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누구나 좋은 설교나 강의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좋은 것과 나쁜 것, 양지와 음지가 섞여 있습니다. 유튜브가 가짜 뉴스의 온상이 된 것은 분명히 그 역기능입니다. 하지만 순기능도 많습니다. 저는 그 순기능이 한국 개신교회를 재건하는데 큰 동력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중 하나가 CBS잘잘법’(잘 믿고 잘 사는 법, 구독자 27만 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표 강사로는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와 연세대 김학철 교수가 있습니다. 그저께(4/2) 김학철 교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인가요?”라는 강의가 유튜브에 올라왔는데, 벌써 5만 명 이상이 봤습니다. 저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봤는데, 내용이 좋으니 여러분도 꼭 보시기 바랍니다.

그 강의에서 김학철 교수는 부활이 역사적사실임을 꽤 설득력 있게 논증합니다. 여기서 역사적 사실이라는 말이 중요한데, 부활은 객관적 사실이나 ‘(자연)과학적 사실또는 실증적 사실이 아닙니다. 부활은 주관적 사실이고 동시에 상호주관적인 사실이며, 또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동영상을 보시고, 저는 여기서 김학철 교수 강의의 결론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성서가 증언해주는 바는 예수께서 돌아가셨는데, 그 부활하신 몸이 그 이전의 몸과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차원을 동시에 가지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제자들은 자신들이 충격적으로 본 그 부활의 사실을 가감 없이 최대한 기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려고 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복음서와 서신서와 이 모두를 포함한 신약성서의 증언은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고 확신에 차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 결론은 부활을 여전히 목격자역사적 증언이라고 설명하기에 저와는 견해를 달리하지만, 그래도 한국 개신교회가 부활을 이렇게라도 설명하면 소위 교회 졸업생’, 즉 가나안 성도는 좀 줄어들 듯합니다.

 

기존 부활 신앙의 문제점

사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부활 신앙입니다. 죽은 사람은 결코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이는 인류의 경험이고 상식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납득이 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것을 자꾸 믿으라고 합니다. 주일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외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고 고백하게 해서 억지로라도 부활을 믿도록 강요합니다. ? 부활을 믿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믿으면 뭐가 달라집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 또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해 죽음에 대한 승리를 말하기도 하고, ‘부활의 소망을 설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죽은 다음 내세에서, 즉 천국에서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과거) 부활을 근거로 죽은 자의 (사후) 부활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부활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의 사실로 믿게 하고, 죽은 자의 부활은 미래의 소망으로 믿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부활은 믿는 자의 지금의 삶과 무관한 교리적 관념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기만 하는 부활일 뿐 결코 살아야 할 부활은 되지 못합니다. 믿는 부활은 사후(死後)를 대비해서 들어두는 사망보험과 같은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부활을 믿어도, 믿지 않아도 그 사는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내세에서의 부활을 믿는 신앙이 오늘의 참혹한 고통을 견디게도 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갖게 된 상실의 아픔을 위로해 주기도 합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믿어도 그저 그렇게 살고, 믿지 않아도 그저 그렇게 삽니다. 이것이 기존 부활 신앙의 문제점입니다.

 

부활에 대한 오해

마커스 보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라는 책에서 그리스도교의 기본 용어들이 그리스도인, 비그리스도인 할 것 없이 심각하게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말이라는 용어가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종말을 지구의 종말이라는 말처럼 창조세계의 종말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종말의 원뜻은 그게 아니고 창조질서를 더럽힌 악의 종말, 폭력의 종말을 뜻합니다. 그래서 종말을 하나님의 세상 악 대청소라는 말로 바꿔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復活)은 소생(蘇生)과 다른데, 사람들은 부활을 소생과 착각합니다. 영어로 부활은 resurrection이고, 소생은 resuscitation입니다. 다른 단어입니다. 물론 부활과 소생은 둘 다 죽음을 전제합니다. 둘 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소생은 죽음에서 회복되는 것이고, 부활은 죽임(당함)’극복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죽기 위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죽지만 죽기 위해서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죽음은 삶의 목적이 아닌,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부활은 생명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죽음을 거슬러서 영원히 사는 게 아닙니다. 부활은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인위적이며 불의한 죽임과 맞서는 개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세상에 오셨다고 잘못 믿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은 죽음에 있었다는 뜻인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죽기 위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죽으러오신 게 아니라 살리러오신 것입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시어 모든 사람이 그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죽임의 세력이 그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처형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거스르는 불의한 세력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자연사도 아니고, 사고사도 아니며, 자살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살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자연적인 죽음의 극복이 아니라, 불의한 세력이 저지른 죽임의 극복입니다.

 

부활을 믿어서 뭐가 달라지는가?

이렇듯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자연적인 죽음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불의한 세력이 자행한 죽임에 대한 승리입니다. 불의한 세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자기들이 결정적으로 승리했다고 믿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죽임당한 예수님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죽임에 대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생명이 다시 살아났음을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 나라가 열렸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세상 악 대청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런 하나님을 믿고, 부활의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첫 제자들은 부활을 믿었을 뿐 아니라 부활을 살았습니다. 부활의 삶을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살았던 것입니다.

제가 오늘 증언 제목을 부활을 확신하십니까?”라고 했습니다. 부활을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믿느냐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죽임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실 것을 믿습니까? 비록 세상에서는 불의가 득세하지만, 끝내는 정의가 이길 것을 확실히 믿습니까? 악한 세상 한복판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선을 행하면 마침내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은 세상이 다시 도래하리라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을, 그 확신을 여러분의 삶으로 입증하십시오. 장차 올 세상을 지금 여기에서 살아내십시오. 미래의 기쁨을 현재에 누리며 오늘 부활의 삶을 사십시오. 지금, 이 순간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죽임의 세력에 대해 주저함 없이 충만한 생명의 삶을 누리며 사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산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여러분의 삶에 그런 변화를 가져온다면, 여러분은 진정 부활을 확신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끝으로 류형선 씨가 작사·작곡한 국악찬송 <믿음이 이기는 그날까지>의 가사를 소개하며 오늘 증언을 마치고자 합니다. 저는 이 가사가 부활 신앙, 부활의 삶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고 작은 일들을 소중히 여기며 하루하루 열심히 승리합시다

더 큰 승리를 위하여 작고 작은 승리를 거두며 삽시다.

 

나로 인해 이웃이 새 힘을 얻고 나로 인해 주변이 밝아지면

더 큰 희망이 열리니 하루하루 열심히 희망을 삽시다.

 

슬픈 일이 있거든 피하지 맙시다 어려운 일 닥쳐도 당당하게

더 큰 믿음을 주시니 힘든 일들 가운데 연단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