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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1년
제목 [7. 11]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1-07-11
조회수 15
첨부파일
p210711_질그릇 1단.pdf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4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5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6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7우리는 이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의 피로 구속 곧 죄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8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셔서, 9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10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11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분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해진 일입니다. 12그것은 그리스도께 맨 먼저 소망을 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3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날인을 받았습니다. 14이 성령은,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을 때까지 우리의 상속의 담보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십니다. (1:3-14)

 

감사가 아닌 찬양

오늘 본문 말씀은 에베소서’ 13절부터 시작하는데, 그 앞에 있는 1절과 2절은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발신인),

 

1

[에베소에 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수신인),

이 편지를 씁니다.

2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인사말).

 

1절과 2절은 당시 그레코로만(Greco-Roman) 사회에서 통용되던 편지의 서문(序文)’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먼저 발신인을 소개하고, 이어서 수신인을 밝힙니다. 그리고 은혜와 평화를 비는 인사말이 뒤따릅니다. 그렇다면 3절부터 이어질 본문’(本文)감사의 말이어야 합니다. 바울의 친서는 논쟁 서신인 갈라디아서를 빼고 본문을 모두 감사의 말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본문은 특이하게도 감사가 아닌 찬양으로 시작합니다. 그 찬양이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학자들은 이 찬양이 신약성서 중에서 가장 밀도 있게, 또 가장 아름답게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한 하나님 찬양이라고 말합니다.

 

찬양의 내용

그런데 이 찬양은 헬라어 원문에서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어서 그 내용 분석이 쉽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어는 어순상 종속절(從屬節)이 앞에 있고, 주절(主節)이 뒤에 있어서 더 그렇습니다. 3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라고 시작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찬양합시다가 주절입니다. 영어 번역본은 “Praise the God”이 문장의 맨 앞에 있어서 주절 파악이 쉽습니다. 이 주절은 3절의 주절일 뿐만 아니라, 14절까지의 찬양시 전체의 주절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3절 하반절은 하나님 찬양의 이유를 밝힙니다. 그 이유는하나님께서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기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령한 복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4~14절은 그 복의 내용을 차례로 밝히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택하셨다(4), 자녀로 예정했다(5), 죄를 용서했다(7), 신비한 뜻을 알려주셨다/비밀을 계시했다(9), 상속자로 삼으셨다(11, 5절 반복), 약속하신 성령의 날인을 받았다(13) 등입니다.

신령한 복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듯하면서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익숙하기는 한데, 막상 설명하려면 뜬구름 잡는 것같이 막연합니다. 창세 이전의 선택과 예정, 십자가 사건, 성령의 인침 등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히 이해되지 않는 알쏭달쏭한 교리’(敎理)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교리 해설이 아닌 다른 접근법으로 이 찬양을 해석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왜 찬양’(praise)을 하는가에 대한 이유 탐구입니다.

 

찬양은 다른 세상을 꿈꾸는 그 일에 참여하는 것

성서의 대표적인 찬양은 시편입니다. 무려 150편이나 되는 많은 시편이 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찬양이 얼마나 중요했나를 잘 보여줍니다. 본래 시편에는 가락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시편을 읽지 않고 노래합니다. 시편은 분명 노래요 찬양입니다.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경험한 후에 그에 대해 응답해서 부른 노래라고 주장한 구약성서학자가 있었습니다. 저명한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가 바로 그입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대한 인간의 반응, 응답, 특별히 노래로 한 응답이 시편의 찬양입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하나님이 구원 사건을 벌일 때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그 일이 마무리된 후에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는 것입니다. 하긴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파라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하나님이 내린 열 가지 재앙을 겪은 후에, 특히 모든 장자가 몰살당하는 참변을 겪은 후에 비로소 히브리인들을 내보냅니다. 히브리 노예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홍해가 갈라졌을 때도 두려워한 것 말고는 한 게 없었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을 때도 뿔 나팔 부는 사제들 뒤를 따라서 성 주위를 걸은 것 외에는 한 게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하나님이 일으킨 구원 사건이 다 끝난 다음에 노래를 지어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구원의 사건을 감사하며 찬양하며 축하했다는 것이 폰라트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후대 사람인 크라우스 베스터만’(Cluas Westermann)의 생각은 다릅니다. 시편의 찬양은 단순히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반응하고 응답하는 감사의 노래에 그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예배에서 했던 찬양은 과거의 어느 때에 벌어졌던 구원 사건을 단순히 기억해서 되돌아보고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완성된 모습으로 창조했고 사람은 타자(他者)로서 그걸 누리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혼돈(카오스)을 갈라내고 질서를 세우심으로써 창조 사역을 계속하고 계시고 사람은 거기에 파트너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대해서도, 사람은 그것과 떨어져 객체로 머무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동반자로 거기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다짐하고 실천하는 마당이 바로 예배이고, 그중에서도 특히 찬양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찬양은 늘 변조되어왔고 편곡되어왔습니다. 과거에 벌어졌던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같은 가락과 같은 노랫말로 반복해서 부른 것이 아니라, 변조된 가락과 노랫말로 편곡하고 개사해서 부름으로써 지금 여기서자신들의 얘기를 담아냈습니다. 그들은 찬양하면서 지금 여기와 다른 세상을 꿈꾸고, 봤고,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찬양은 꿈을 꾸는 행위입니다. 찬양은 다른 세계를 꿈꾸는 행위입니다.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찬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하신다고 믿고, 그 일에 우리를 동반자로 부르셨다고 믿는 사람이 찬양합니다. 오랫동안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매를 맞아가면서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불렀던 것은 그 노래가 자기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주고 고통을 잊게 해줬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찬양을 부르면서 실제로 자신들의 인권이 실현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행진에 참여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니, 그 찬양을 부르면서 그들은 실제로 그 행진에 참여하여 그 대열 안에 있었습니다.

 

찬양은 세상을 바꾸는 역동적인 시()

그렇습니다! 찬양은 지금 주어진 세상, status quo, 현재 상황을 별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산문(散文)의 언어가 아닙니다. 나는 내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 세상은 바뀔 수 있다, 하나님은 나와 세상을 지금 이대로가 아니라 바른 방향으로 바꾸시려고 한다, 그 일을 맡기기 위해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온 맘과 온 영혼과 온몸을 바쳐 외치는 시()적인 언어입니다. 찬양은 지금 내 삶을 옴짝달싹할 수 없는 운명이나 팔자로 받아들이고 입 다물고 사는 맥없는 산문의 언어가 아닙니다. 나의 삶은 내가 희망하는 대로 바뀔 수 있다, 나는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터뜨리는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시적 언어입니다.

우리에게는 도덕의 가르침도 필요합니다. 각자가 가진 수많은 문제도 해결해야 합니다. 매일의 일상이 무겁기 그지없기에 그 안에서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위로의 말씀도 필요합니다. 그뿐인가요, 바른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바른 가르침교리(敎理)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들 못지않게, 아니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한 것은 지금 현재 나의 삶을 더 낫게 바꾸겠다는 의지요 희망이며,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입니다. 나와 내 후손이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는 더 살만한 곳이 되고, 하나님 나라라는 이상에 좀 더 다가가고, 외롭고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 물질로나 정신과 영혼으로나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희망,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감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찬양할 때 우린 그런 희망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찬양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노래이고, 그 가능성을 현실화합니다. 찬양은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현실과 기존질서를 뒤집어엎을 힘을 갖게 해 줍니다.

찬양은 아름다운 가락과 판타지 같은 가사에 취해 현실의 문제에서 나를 도피시키는 환각제가 아닙니다. 나를 척박한 이 땅에서 금빛 천상으로 이끄는 마술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내 신분과 소명을 깨닫게 하고, 나를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게 해 하나님 일을 하게 하는 출정가입니다. 류형선 선생의 <희년을 향한 우리의 행진>을 읊조리면서, 지금까지 제가 찬양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평화가 들불처럼

사랑이 햇빛처럼 하나님 주신 생명 보듬어

희년을 향해 함께 가는 길 주의 약속 굳게 믿으며

일곱 번씩 일곱 번 넘어져도 약속을 굳게 믿으며

 

눈물로 씨를 뿌리며 지나온 수난의 세월

보아라 우리 눈앞에 새 하늘이 활짝 열린다

희년을 향해 함께 가는 길 주의 약속 굳게 믿으며

일곱 번씩 일곱 번 넘어져도 약속을 굳게 믿으며

 

가슴이 뜨거워지고, 맥박이 요동치며, 손과 발에 힘이 솟구치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

이제 먼 길을 돌아 오늘 본문 말씀으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찬양입니다. 비록 여러 교리적인 용어와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찬양입니다. 그러니 교리적인 용어와 개념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시고, 이 찬양이 품고 있는 꿈과 희망과 믿음과 의지를 느껴 보려고 해 보십시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시 읽어보십시오. 이 찬양을 부른 이들의 형편과 처지를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맥박이 뛸 것입니다.

제가 요즘 연세대 김학철 교수가 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을 읽으며 바울을 총정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찬양을 드린 이들은 로마라고 하는 대제국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식민지 땅에서 시민권도 없이 살았습니다. 그들은 흙수저, 아니 그마저도 없이 수저로 태어난 이들이었고, 밑바닥 민중이었으며, 사회에서 아무 존재감이 없던 놈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언제부턴가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은 nothing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not anything인 정도가 아니라 something(중요한 것)이었고, 심지어 everything(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인식이 저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 비록 로마시민권은 없었어도 하늘시민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저들은 세상에 태어나면서 버려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세상 창조 이전에 택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신의 가족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예정됐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인 줄 알았더니 실은 백조였습니다. 비록 지금은 땅에 살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늘 백성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이제 세상이 덧씌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허위의식, 즉 죄의식에서 해방됐습니다. 저들은 하늘에서 쫓겨난 시민이 아닙니다. 세계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비밀 계획을 하나님과 함께 성취하고자 땅으로 파견된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그 증거는 약속된 성령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저들이 이런 깨달음에 이르게 된 결정적 계기는 예수 그리스도때문입니다. 예수는 저들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살다가 제국의 십자가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끽소리도 못하고 죽임당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서 부활시켜서 예수에 대한 세상의 평가와 처사를 뒤집어엎었습니다. 죽음을 부활로 뒤바꿈으로써 천지를 개벽하고, 새 세상이 시작되었음을 알렸습니다. 저들은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한 그리스도 안에서’(ἐν Χριστῷ) 저들은 자신들도 하늘 시민, 신의 가족,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임을 깨달았고, 그런 존재답게 그때 거기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아냈습니다. 오늘 본문의 찬양은 그것을 고백하고, 다짐하고, 결단하는 행진곡입니다.

앞에서 찬양은 늘 변조되어왔고 편곡되어왔다고 했습니다. “과거에 벌어졌던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같은 가락과 같은 노랫말로 반복해서 부른 것이 아니라, 변조된 가락과 가사로 편곡하고 개사해서 부름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자신들의 얘기를 담아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함께 부를 찬양은 무엇입니까? 찬양하면서 꿈꾸어야 할 지금 여기와 다른 세상은 무엇입니까? 아니 그보다 먼저 여러분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상 구원 계획을 위해 선택받아 세상에 파견된 존귀한 하나님의 동역자임을 깨달아 아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 자신과 세상의 변화를 위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라는 새 세상을 꿈꾸고, 그걸 실현할 수 있다고 굳게 믿으면서, 자신과 우리 교회공동체와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