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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1년
제목 [11.21] 예수 우리 왕이여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1-11-22
조회수 58
첨부파일
p211121_질그릇 1단.pdf

예수, 우리 왕이여!

 

4b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셨고, 6우리로 하여금 나라가 되게 하시어 자기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7"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8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1:4b-8)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우리가 사용하는 태양력과는 달리 교회의 전례력(‘삼위일체력이 아닌 축제력’)대림절 첫째 주일부터 새해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대림절 첫째 주일은 매년 1127일에서 123일 사이의 주일이기 때문에, 올해는 1128일인 다음 주일이 교회력의 새해 첫날이 됩니다. 따라서 오늘이 교회력으로 올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교회는 한 해를 마감하는 오늘을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로 지킵니다. 영어로는 ‘Christ the King Sunday’인데, 이를 번역하면서 교단에 따라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성공회, 루터교회)이라고도 하고, ‘그리스도 왕 주일(가톨릭, 예장 통합)이라고도 합니다. 같은 뜻으로 오늘을 ‘Reign of Christ Sunday’라고도 하는데, 이를 감리교회는 왕국주일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미국 개신교회는 오늘을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증언 서두에 재미없고 따분한 교회력 이야기를 해서 죄송한데, 이게 굉장히 중요하기에 조금 더 설명하고자 합니다. 한국 개신교회가 지키는 가장 큰 명절 가운데 하나인 추수감사절은 미국 개신교회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1620년에 102명의 영국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들은 그해 겨울 혹독한 추위와 질병을 가까스로 이겨내고, 다음 해 봄 나무를 베고 땅을 개간하여 씨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가을에 첫 수확을 한 후 감격에 넘쳐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미국 추수감사절의 기원인데, 미국은 매년 11월 네 번째 목요일(1122~28일 중)을 추수감사절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서 한국 개신교회는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켜왔습니다. 111일이 주일인 경우를 제외하면, 미국의 추수감사절 직전 주일이 11월 셋째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많은 한국 개신교회가 지켜온 추수감사절 날짜가 미국 개신교회가 지키는 날짜라는 점은 좀 유감스럽지만, 11월 셋째 주일이 대부분 대림절 직전 주일이라는 점은 매우 뜻깊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감사로 매듭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 교회가 추수감사절을 11월 첫째 주일로 옮겨서 지키고 있지만, 한 해를 마감하는 신앙인의 삶의 주제가 감사여야 한다는 정신은 꼭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 추수감사절한 해를 감사로 매듭지으라는 교훈을 준다면,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한 해를 마치면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심을 기억하라는 교훈을 줍니다. 사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그런데 그 최종 결론이 왕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이는 하나님 구원 사역의 최종 목표와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라는 것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우리 왕이여!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모임찬송으로 찬송가 38예수 우리 왕이여를 불렀습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여러분 심정이 어떠셨는지요? 멜로디는 은혜로운데, 가사는 별로였나요? ‘군주제시대가 아닌 민주공화국시대에 이라는 말은 매우 낯설고, ‘권위주의를 상징하는 것 같아 거슬리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왕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다라는 말은 성경의 핵심 주장이고, 기독교의 중심 사상입니다.

구약을 보면 출애굽 한 히브리들이 모세의 인도로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열두 지파 동맹체를 결성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실질적인 출발이었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시작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스라엘의 헌법이 소위 십계명인데, 그 제1계명은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20:3)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세계의 모든 나라는 신정(神政) 국가, 즉 신이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왕 바로(Pharaoh)는 하늘의 신 호루스(Horus)의 화신(化身)이며, 태양신 라(Ra)의 아들이었습니다. 즉 그는 사람이 아니었고 신이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는 십계명의 제1계명은 다른 왕을 섬기지 못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 “이스라엘의 왕은 여호와/야훼 하나님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사(판관)시대 이스라엘에는 인간 왕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후에 이스라엘은 주변국들의 침략을 막는다는 구실로 지파 동맹에서 왕국으로 전환했습니다. 하지만 왕과 함께 등장한 예언자들이 부르짖던 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치하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니, 너 인간 왕은 하나님 뜻을 대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을 보면 예수님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 즉 하나님의 왕국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어는 reign of God, rule of God, 즉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지배를 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헤롯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신 세상, 즉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고 다스리는 세상이 바로 예수님이 말한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의 대표적인 메시지 중 하나는 예수가 주님이시다입니다. 이를 영어로 하면 “Jesus is the Lord”입니다. 여기서 Lord의 첫 글자가 대문자이고, 그 앞에 정관사 ‘the’가 붙어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은 예수가 유일무이한 주님이란 뜻입니다. 이를 당시 로마 제국의 상황(context)에 놓고 읽으면, “(인간이 아닌 신으로서) ‘예배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뜻을 가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주님이 아니고, 예수가 유일한 주님이다라는 말입니다.

 

주께서 왕이시라!

이처럼 구약과 신약 모두 성경의 핵심 주장은 하나님이 왕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하고 가장 잘 요약한 것이 류형선 님이 작사하고 작곡한 국악찬송 주께서 왕이시라라고 생각합니다.

 

주께서 왕 위에 오르신다 무서워 숨는 자 그 누구냐

우리의 마음은 춤을 춘다 주께서 왕이시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얼씨구나 좋다 지화자 좋네 주께서 왕이시라

 

정의의 오른팔 쳐드신다 두려워 떠는 자 그 누구냐

산천아 초목아 노래하라 주께서 왕이시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얼씨구나 좋다 지화자 좋네 주께서 왕이시라

 

이 곡은 하나님께서 왕이 된 세상,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세상을 시적으로 집약해서 표현해 놓았습니다. 또한, 그것을 국악 장단과 가락에 담아 그 신명을 극대화했습니다. 이 찬송을 부르고 있으면 하나님 나라가 머릿속과 가슴속에 그려지고, 마치 그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뻐서 덩실덩실 춤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꿈(vision)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참 세상의 도래입니다. 그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달리)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들풀처럼 피어나고, 사랑이 햇빛처럼 쏟아지고, 뭇 생명이 풍성히 꽃피고 열매 맺는 새 하늘 새 땅입니다. 우리는 그런 (천국 같은) 세상이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고,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런 새 세상을 포기할 수 없기에 1년에 한 번씩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을 반복해서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 보존과 평화에 대한 희망과 바람이, 정의와 사랑에 대한 움직임이 작고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때일수록 그리스도 왕 주일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희망을 불어넣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성

오늘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을 맞아 우리에게 주어진 서신서 본문은 요한계시록 14절로 8절 말씀입니다. 로마 제국의 가혹한 억압에 시달리고 있던 식민지 백성 요한은 유배지에서 놀라운 비전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군사력으로 세상을 압도하는 로마가 득세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는 흔들림 없이 확신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증언했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요한은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1:4b-5)

 

요한은 하나님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으로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 3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기소개를 상세하게 풀어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문장의 기본적 의미는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에 다 담길 수 없는 크신 존재다라는 뜻이지만, 더 깊은 의미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너희가 장차 보게 될 방식으로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실존적·실천적 현존, 곧 사람들을 위하여 계시는 그분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요한은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일부러 시간적 순서를 뒤바꿔놓고 있습니. ‘현재’, ‘과거’, ‘미래순으로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박해의 시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이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왕이신 예수

또 요한은 예수님을 신실한 증인이요,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고,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신실한 증인은 십자가를,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는 부활을,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는 재림을 각각 가리킵니다.

그리스어로 증인이라는 단어와 순교라는 단어는 뿌리가 같습니다.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의 운명은 순탄치 않습니다. 그래서 증언은 종종 순교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단순히 진리나 진실을 말했다고 순교하지는 않습니다. 말이 말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순교가 뒤따르게 됩니다. 본문이 말하는 신실한 증인은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더 사랑하는 자가 더 크게 희생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신실한 증인이라는 표현 속에는 십자가의 사랑이 오롯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생명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이었습니다. 꽃이 진 바로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생명은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이 첫 열매라는 말은 우리 또한 부활의 열매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도전이요 초대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오실 왕이십니다. 그날이 오면 세상의 모든 권세를 당신의 발 앞에 굴복시키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 돌입해 오시는 주님의 현실에 주목하면서 그 현실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즉 현재에서 미래를 보며, 그 미래를 지금 살아내야 합니다.

요한은 이런 그리스도의 삼중적 존재 양식이 우리에게 왜 은혜인지를 설명합니다. 5b절은 주님이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해주셨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는 죄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 때, 우리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소속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힘(might)이 아니라 정의(right),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 지배가 아니라 사랑이 더 궁극적이라는 사실을 삶으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질서에 속한 사람임을 일상의 자리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그렇게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정화하는 사람들, 즉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를 이런 삶으로 초대해주신 주님께 영광과 권세가 무궁하기를 비는 것입니다.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을 앞둔 지난 금요일 <국민일보> 미션라이프에 지금 세상에서 가장 빨리 퍼지는 종교는 자기 숭배’(Self-Worship)”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미국 바이올라대 테디어스 윌리엄스 교수의 칼럼에 기초한 기사였습니다. 그는 장로교의 표준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의 제1문 내용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자신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로 바뀐 듯하다고 진단합니다. 즉 하나님 숭배가 아니라 자기 숭배가 추세라는 것입니다. 이 기사 내용에 다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현대의 자기 숭배 현상에는 동의합니다.

개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공동체보다는 개인이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개인보다 공동체가 늘 우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주의를 가장한 집단주의가 개인의 희생을 강요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반향으로 개인주의가 지나치게 중요해졌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통일입니다. 예전에는 통일은 당위였습니다. 민족공동체가 최우선적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이익이 더 중요합니다. 통일돼서 내가 지금보다 더 못살게 되고 불편해지면 통일이 싫습니다. 민족도 나라도 다 필요 없고 내가 최우선입니다.

그런데 나 중심, 자기 사랑은 결국 자기 숭배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강조하면서, ‘자기 사랑은 경계합니다. 디모데전서 32절은 말세의 징조를 열거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등등입니다. 말세의 징조 중 자기 사랑이 맨 앞에 나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자기 사랑을 금지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19:19)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자기 몸을, 즉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자기 사랑의 목적은 자기 사랑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해 있습니다. 이는 마치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건강한 사람이 먼저 산소마스크나 구명조끼를 챙겨야 하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그 이유는 건강한 자기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한 자기살아서 남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렇듯 자기사랑하는 것과 자기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웃 사랑이 빠진 자기 사랑은 결국 자기 숭배로 나아갑니다. 이게 성경 말하는 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왕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다. 그러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자기 숭배에 빠지는 파멸의 길로 가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 참 자유를 얻게 되며, 하나님을 사랑할 때 자기를 더 존중하고 더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역설이 바로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나만 잘사는 세상은 천국같아도 실은 지옥입니다. 나도, 남도,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에서 우리는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러니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인 오늘, 우리는 주님의 왕 되심을 기억하며 우리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제가 지난 주일 임직예배 때 소개한 조수아 씨의 노래 내가 주인 삼은이라는 곡을 들으시면서 오늘 말씀을 묵상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