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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1년
제목 [11.28] 그 날이 오고 있다!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1-12-01
조회수 85
첨부파일
p211128_질그릇 1단.pdf

그날이 오고 있다

 

14"나 주의 말이다. 보아라,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약속한 그 복된 약속을 이루어 줄 그날이 오고 있다. 15그때 그 시각이 되면, 한 의로운 가지를 다윗에게서 돋아나게 할 것이니, 그가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16그때가 오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예루살렘이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 하는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33:14-16)

 

대림절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성탄절을 앞둔 4주 동안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이 절기 동안 오신예수님과 오실예수님을 동시에 생각합니다. ‘오신 예수님2천 년 전 첫 번째 크리스마스 때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던 아기 예수를 가리킵니다. 오실 예수님은 언젠가 종말에 권능을 떨치며 구름 타고 오실 재림 예수를 가리킵니다. 한 분은 이미오셨고, 다른 한 분은 아직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대림절은 이미아직사이를 사는 우리의 실존에 대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고 성찰하는 계절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already)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not yet)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온전히 완성될 것입니다. 이미아직사이의 시간 동안 지상의 교회는 예수님이 뿌린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정성껏 가꾸고 키워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요 존재 이유입니다.

 

3년간 구약을 본문으로 증언

교회의 새해를 출발하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성서 예레미야서 3314절로 16절입니다. 제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했던 첫 번째 증언에서 9년간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표’(lectionary)에 따라 설교하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표는 3년을 주기로 반복되는데, 매 주일 4개의 말씀이 제시됩니다. 4개의 말씀은 일반적으로 구약, 시편, 서신서, 복음서에서 각각 제시됩니다. 당시 저는 매 주일 제시되는 시편은 성시로 교독하고, 3년은 복음서를, 그다음 3년은 서신서를, 그리고 마지막 3년은 구약성서를 본문으로 설교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오늘의 증언 본문이 구약의 예레미야서라는 사실은 제 목회가 벌써 햇수로 7년 차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세월이 참 빠르지요? 아무튼, 약속한 대로 앞으로 3년 동안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약성서를 본문으로 매 주일 증언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언과 성취?

교회의 전례력 (Year C), 그러니까 3년 주기의 마지막 해 대림절 첫 번째 주일 구약성서 본문으로 예레미야서가 주어졌습니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고한 것처럼 들립니다. 기독교는 흔히 예언과 성취라는 도식으로 구약의 예언서를 이해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는 앞날을 미리 내다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즉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예언자는 예측하거나 예고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뜻을 대신 말하는, 대언(代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어로 ‘prophet’이었지 ‘predictor’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미래에 있을 일을 미리 알려주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라고 한 일도 있기에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언자가 앞날을 미리 내다보거나(先見), 미리 알거나(先知), 그래서 미래를 말하는(豫言) 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점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데 있지,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즉 예언자는 대변인이지 예보자가 아닙니다. 신탁(神託)’ 담당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예언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을 했고 그것이 훗날 성취된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하나님이 예언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대언하도록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된 후에 그 죽음의 의미를 찾고자 그들의 경전인 구약성서를 샅샅이 뒤졌고, 마침내 예언서들에서 그 답을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의 신학자들이 예언서의 특정 말씀을 예수님과 연결해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귀가 딱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 예언() 성취가 아니라, () 사건() 해석이라고 봐야 맞습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는 역사화된 예언’(prophecy historicized)이라고 합니다. ‘역사화된 예언이란 구약성서에서 예언된 말씀이 복음서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을 가리킵니다.

 

예레미야서 본문이 선포된 상황

따라서 우리는 예언과 성취라는 도식에 얽매이지 않고, 예언서 자체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본문이 선포된 상황(context)부터 알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흔히 눈물의 예언자또는 수난의 예언자라고 불립니다. 그렇게 불린 이유는 그가 다른 예언자들보다 더 비참하고 더 비극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고문을 당했고 투옥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가 동족에게 전해야 했던 하나님의 메시지 내용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는 조국 유다가 이방 나라인 바빌론에 의해 멸망할 운명에 놓였다는 메시지를 동족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회개해도 소용없고 기도도 하지 말하는 메시지를 동족에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는 조국 유다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거듭 외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메시지를 외쳤던 때는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 강점기 직전의 구한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코앞에 닥친 일을 말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 메시지는 단순히 우리나라는 이제 곧 망한다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곧 침략할 것인데 우리는 무조건 항복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예레미야는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친바빌론 민족반역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미워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유다 백성들로부터는 조롱과 멸시 그리고 박해의 대상이 되었고, 고향 사람들로부터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파멸의 메시지만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뽑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로 하라”(1:10)는 신탁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에게 심판과 재건, 멸망과 구원의 약속이라는 상반되는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분량만 놓고 보면 뽑고 부수라는 메시지가 세우고 심는 메시지보다 월등히 많습니다. 그러니까 둘 사이에는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그가 유다가 바빌론에 의해 멸망한 시기에 주로 활동했으니 재건과 구원보다는 심판과 멸망의 메시지가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이해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우고 심으라는 재건과 구원의 메시지에 주목하지 않지만, 그것은 예레미야서를 잘못 읽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에는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가 가물에 콩 나듯 군데군데 들어있습니다. 유일한 예외로 그 메시지가 한 군데 모여 있는 곳도 있는데 30장에서 33장까지 4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대목을 위로의 책’(the book of consolation)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의 본문도 이 중 몇 절입니다. 제가 가톨릭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14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게 한 약속을 이루어 주겠다. 15그날과 그때에 내가 다윗을 위하여 정의의 싹을 돋아나게 하리니, 그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 16그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예루살렘이 안전하게 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이 말씀이 메시아의 탄생과 인류의 구원을 약속한 예언이 아니라면 무슨 뜻일까요?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가 멸망해서 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조건 없는 회복을 약속한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일까요?

 

기후재앙 앞에 놓인 인류의 현실

저는 오늘 증언을 위해 예레미야서를 읽고 묵상하다가, 먼 옛날 예레미야가 처해있던 현실과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이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유다는 바빌론의 침략 앞에서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지금 인류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가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재앙으로 치닫고 있고, 이대로 가면 멸종에 다다를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당시 유다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빌론을 겁내지 않고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것이었습니다. ? 과거 아시리아가 쳐들어왔을 때도 별 탈 없이 위기를 그냥 넘긴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뭐 별일 있겠어? 다 쓸데없는 걱정이지. 위기론은 거짓 뉴스고 불순 세력의 술책이야. 그러니 그냥 지금처럼 잘 먹고 잘살면 돼.” 다른 선택은 이집트에 도움을 청해 바빌론과 맞서는 것이었습니다. 바빌론도 힘이 세지만 이집트 역시 그러니까, 이집트에 기대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 것이란 낙관론입니다. “기후변화가 인류에게 위기인 것은 맞지만, 우리에게는 과학이 있잖아. 과학이 과거에 인류가 당면했던 문제들을 해결했듯이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러니 너무 근심 걱정하면서 절망할 필요 없어.”

마지막 선택은 예레미야처럼 위기의 심각성을 깨닫고 대처하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계속 그렇게 살면 우리는 망해. 희망이 없어.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없어. 그러니 철저하게 회개하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새롭게 살자.”

지금 생태환경운동가들이 하는 경고는 예레미야의 메시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당시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은 그 경고를 직·간접적으로 외면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발전론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변하는 게 불편해 설마하는 막연한 기대에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2020년 말에 기후변화를 공부하고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우리는 더는 녹색교회라는 타이틀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교인 모두가 녹색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4가지 과제를 정하고 지난 1년간 실천해 왔습니다. 그린 엑소더스읽기, 생활 속 탄소금식실천, 몽골 은총의 숲에 나무 한 그루 이상 심기(그루당 1만원), 생태 및 환경 운동단체에 회원 가입하기. 연말을 앞둔 지금 우리의 성적은 몇 점이나 될까요?

 

조건 없는 회복?

오늘 본문은 아무 조건 없는 회복을 약속한 말씀이 아닙니다. 유다가 왜 망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망한 나라와 백성을 고생했다고 해서, 불쌍하다고 해서 아무 조건 없이 원상으로 회복시켜준다? 우리는 그렇게 희망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증거가 본문 안에 나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원상회복을 말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바빌론에 의해 남 유다가 망했는데 왜 오래전에 아시리아에 망한 북 이스라엘까지 언급할까요?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서로 다른 나라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때 잠시 통일 왕국을 이룬 적이 있지만, 그 잠깐을 제외하고는 내내 다른 나라였습니다. 또 같은 신, 야훼 하나님을 믿고 섬겼지만, 종교전통은 매우 달랐습니다. 이 종교전통을 신학전통또는 국가 이데올로기라고 불러도 무방한데 당시에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세 전통이라고 부르는 북왕국의 종교전통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야훼 하나님과 맺은 언약(covenant)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만일’(if)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 하나님이 준 계명을 지킨다면 하나님도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곧 일정한 조건이 붙어있는(conditional) 언약이었습니다. 반면 남왕국 유다의 신학전통은 다윗 전통이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은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세운 성전에 거하시며 예루살렘을 외적으로부터 지켜주시며 다윗의 후예가 영원히 왕좌에 앉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는 조건이 붙어있지 않은 무조건적인 언약이었습니다. 이렇듯 두 나라는 서로 다른 신학전통, 또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었고 그것을 발전시켜왔습니다. 이 차이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예레미야가 활동했던 유다의 위기 시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작은 예수로 살아가기를 결단하고 훈련하는 시간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간단히 설명하면 예레미야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모세전통으로 남왕국 유다를 비판한 예언자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성도 예루살렘과 다윗 왕좌가 영원하지 않고 무너져내린 이유를 북왕국 이스라엘의 신학전통인 하나님과의 계약 불이행에서 찾았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국가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세상의 어떤 힘도 무너뜨릴 수 없는 만세반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넋이 나가 하늘을 보며 믿을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일어서야 했습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생각에 있습니다. 생각을 나타내는 생각 사()’ 자는 밭 전()’ 자와 마음 심()’ 자가 결합한 단어입니다. 생각이야말로 우리의 마음이 자라나는 밭입니다. 생각하고 반성하지 않는 정신은 클 수 없습니다. 생각 끝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고, 제멋대로 욕망에 따라 춤을 춘 결과가 오늘의 삶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이게 고난의 신비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생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난은 우리 영혼을 벼리는 숫돌입니다. 사람은 넘어지기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후입니다.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우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자기 삶을 깊이 되돌아보고, 자기 자리를 찾을 때면 우리에게 새로운 선물을 마련해주십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다윗전통에 기초하여 조건 없는 회복을 약속한 말씀이 아닙니다. 모세전통과 연합하여 우리가 옛 생활에서 떠나 새 사람으로 살 때 비로소 보장되는 약속입니다. 모세전통의 핵심은 약자보호에 있습니다. 분배적 정의의 실현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날에는 공평과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15). 그런데 공평과 정의라는 열매는 옛 가지가 아닌 새로 돋아난 가지에 열립니다. 고난을 통해 생각을 하고, 생각 끝에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들에 의해 실현됩니다.

물론 그 새 사람의 대표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면 누군가 더덩하며 함께 장단을 맞춰주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그렇게 해야 새 하늘 새 땅이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대림절은 단순히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절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좇아 우리도 작은 예수로 살아가기를 결단하고 훈련하는 시간입니다. 새 가지가 돋아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새 가지로 돋아나야 할 시간입니다.

그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날이 멸망의 날이 아니라 희망이 날이 되려면, 기후위기라는 비상한 상황 앞에서 이것이 성장과 편리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우리의 잘못에서 비롯됐음을 먼저 깨달은 우리가, 그 옛날 예레미야가 그랬듯이, 먼저 새 가지로 돋아나 마침내 세상을 바꿀 희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서울제일교회가 그리고 우리 서울제일교회 교우들이 그렇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