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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2년
제목 [4.24]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2-05-06
조회수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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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20424_질그릇 1단.pdf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27그들이 사도들을 데려다가 공의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신문하였다. 28우리가 그대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였소.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대들의 가르침을 온 예루살렘에 퍼뜨렸소. 그대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9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30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은 여러분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31하나님께서는 이분을 높이시어 자기 오른쪽에 앉히시고, 영도자와 구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32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십니다.” (5:27-32)

 

구약 본문이 사도행전?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인 오늘, ‘성서일과’(RCL)가 제시한 구약 본문은 사도행전 527절로 32절의 말씀입니다. 구약 본문으로 신약의 말씀이 제시되어서 웬일인가 하실 텐데, 우리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성서일과는 부활절기(Easter Season)에 가··다해 3년 모두 구약 본문으로 사도행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6주 동안 사도행전을 읽고 묵상할 예정입니다.

오늘이 그 첫 시간인데, 오늘은 본문을 자세히 풀이하기보다는, 성서가 말하는 부활의 뜻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부활에 대한 시각 교정작업이 오늘 증언의 주제입니다.

 

초대 교회 부활 로고스

오늘 본문에는 초대 교회의 부활 로고스가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30절과 32a절 말씀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은 여러분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 315절의 초대 교회 부활 로고스와 매우 유사합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이 구절을 강일상 목사는 󰡔부활 되어야 할 부활󰡕이란 책에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창시자를 죽였고,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죽어있는 자들로부터 일으키셨습니다. 그의 증인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아마 먼 전생의 기억처럼 가물가물하실 텐데, 제가 서신서를 본문으로 증언을 했던 2019년 주현절의 몇 주 동안, 성서일과는 서신서 본문으로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을 제시했었습니다. 그때 제가 강일상 목사님이 쓴 󰡔부활 되어야 할 부활󰡕이라는 책을 읽고 감동을 하여 여러분께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먼저 그것을 복습해 보고자 합니다.

 

그때 거기서의 부활은?

여러분은 부활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입니까? 그렇다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도 부활했고(11:1-44),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부활했습니다(7:11- 17). 그런데 기독교는 이들 경우는 부활이라고 하지 않고, ‘소생이라고 합니다. ‘부활소생은 다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고전 15:20)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은 현세(現世)에서 죽고, 내세(來世)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이승에서 죽어서 저승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하냐는 말입니다. 목사들은 그렇게 설교해왔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614절 이하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14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니, 헤롯 왕이 그 소문을 들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egegertai).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하고, 15또 더러는 말하기를 그는 엘리야다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과 같은 예언자다하였다. 16그런데 헤롯이 이런 소문을 듣고서 말하기를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egerthe)하였다.

 

여기서 14절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egegertai)”16절의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egerthe)”에 나오는 살아났다는 단어는 둘 다 부활을 뜻하는 동사 에게이로’(egeiró)의 변형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부활은 이 세상에서 죽어서 천국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우리가 말하는 부활과 그때 거기서당시 사람들이 말했던 부활은 아주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에게서요한의 부활과 엘리야의 부활을 보았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요한의 부활도 보지 못했을 것이고, 엘리야의 부활도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어떤 사람(요한이나 엘리야)의 부활을 다른 사람(예수)에게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부활을 그렇게 이해했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눈으로 부활을 보았던 것입니다.

 

바울의 부활 증언

그런데 사도 바울도 바로 이런 눈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요한의 부활엘리야의 부활을 말했던 것처럼, 바울도 고린도전서 15부활장에서 여러 사람을 보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3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4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5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부활만이 아니라 죽음, 매장, 부활, 현현넷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부활은 4절에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고 한 번 언급하지만, 현현은 5절에서만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두 번 언급합니다. 나아가 이어지는 6~8절에서는 더 길고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6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7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보신 것처럼,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의 부활 증언은 부활보다는 현현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런 식으로 변증한 것일까요? 그 답을 찾는 것이 부활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죽어있는 자의 부활

첫째, 부활은 죽은 자의 부활이 아니라, ‘죽어있는 자의 부활입니다. ‘죽은 자는 보통 사자’(死者)망자’(亡者)를 가리킵니다. , ‘숨이 끊어져서 죽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사람이 부활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죽은 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로 네크로스’(νεκρός)인데, 이 단어는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입니다. , ‘죽은 자죽은죽다라는 동사의 과거형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죽어서 죽은한 것이 아니라 죽지 않았는데도 죽은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을 강일상 목사님은 죽어있다는 말로 바꾸어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죽어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창세기 216~17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렇게 명하십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그런데 3장으로 넘어가면 뱀은 여자를 이렇게 유혹합니다. “(선악과를 먹어도)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고, 이에 맞서듯 뱀은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누구 말이 맞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죽었습니까? 뱀의 논리로는 살아있고, 하나님의 논리로는 죽어있습니다. 살아있는 것 같아도 죽어있습니다. 이것이 타락 설화가 말하는 죄입니다. 살아있는 인간을 죽어있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은 누구나 죽어있는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죄 가운데 사는 죄인들을 성경은 죽어있는 자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죄는 개인적 죄도 포함되지만, 집단적인 죄, 구조적인 죄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죄를 다른 말로 하면 구조악(systemic evil)입니다. 우리는 이 구조악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악인은 물론이고 의인도 구조악에 대해서 공동책임이 있습니다. 바울이 죄인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고 우리가 모두 죄에 종노릇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인간 실존을 두고 한 말입니다.

 

부활의 증인

둘째, 고린도전서 15부활장에서 새번역성서가 나타나셨다라고 번역한 단어 역시 드러나셨다로 고쳐서 읽어야 합니다. “나타났다고 하면 나타난 객관적인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 대상은 당연히 부활한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게바를 비롯하여 5~8절에서 언급된 모든 사람은 다 부활의 목격자들입니다. 즉 저들은 다 부활한 그리스도를 목격했던것입니다. 그런데 원어를 그렇게 번역하면 바울은 절대로 부활의 목격자일 수 없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의 음성을 들었을 뿐이지, 부활한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습니다. 환한 빛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9:3-9 참조).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전서 158절에서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다고 증언했습니다. 이 둘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또한, 이 번역대로라면 우리는 부활의 목격자가 아니므로 죽었다 깨도 결코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18절에 있는 땅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라는 말은 부질없는 헛소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문제는 나타났다드러났다로 고쳐서 읽으면 다 해결됩니다. 이 번역이 원어의 뜻에 더 가깝고, 또 현현(顯現)이라는 단어의 뜻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155a절을 고쳐서 읽으면 “(부활한 그리스도는) 게바에게서 드러나셨다가 됩니다. 이 말은 게바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게바의 말과 행동과 삶을 통해서 밖으로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그의 말과 행동과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셨으니,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부활관입니다. 바울에게 부활은 죽은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드러난 사람들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만 증언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절부터 8절까지 현현을 근거로 부활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드러난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한 것입니다. , 5절부터 8절까지에 열거된 사람들은 부활의 목격자들이 아니라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증인들도 자기 삶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기 전에는 우리와 다름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교회 박해자였습니다. 당시의 초대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현이었습니다. ‘로마의 평화에 대항해 그리스도의 평화를 실현해낸 대안공동체였습니다. 그런 교회를 그가 박해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거역하고 로마제국을 추종했던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가 알고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그는 당시의 구조 악에 복무하는 잘못을 저질렀고, 그랬기에 죄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전향해 지금은 자기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가 꿈꾸고 추구했던 하나님 나라를 교회공동체를 통해 실현하고 있습니다. 즉 그를 통해 예수가, 예수의 꿈과 비전이 다시 일으켜졌던 것입니다. 이게 예수가 부활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부활장을 통해 바울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고전 15:12) 사람들을 향해 과거의 내가 죽은 사람’/‘죽어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삶을 살던 나로부터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킴으로써 내가 예수처럼 살게 되었다. 그러니 이게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성차별하고, 주인과 종을 계급차별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인종차별 하던 죄인 중의 죄인, 죄인들의 괴수였던 나 바울도,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던 나 바울도, 세례를 받고 옛 사람, 옛 가치, 옛 질서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새로 태어났으니, 자신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일으켜지지 못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하는 것이 바울의 부활 신앙입니다.

지금 우리식으로 말하면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는, 그래서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삶을 거부하고, 그런 삶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어있는 사람의 부활입니다.

 

우리가 그 일의 증인이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들이 유대 공의회에 끌려와 대제사장에게 심문받은 이야기가 그 배경입니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초대 교회 부활 로고스를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은 여러분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전제하면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일으키셨다. 우리가 그 일의 증인이다. 우리 말, 우리 행동, 우리 삶을 보아라! 예수를 재현하고 예수를 살아내고 있지 않느냐? 우리에게서 예수를 볼 수 있지 않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 증거는 본문이 위치한 527절 이전의 보도입니다. 사도행전 432절로 35절과 514절로 16절은 이렇게 보도합니다.

 

4:32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33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34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35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5:14믿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면서, 주님께로 나아오니, 남녀 신도들이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15심지어는 병든 사람들을 거리로 메고 나가서, 침상이나 깔자리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 그림자라도 그들 가운데 누구에게 덮이기를 바랐다. 16또 예루살렘 근방의 여러 동네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병든 사람들과 악한 귀신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을 데리고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모두 고침을 받았다.

 

이 보도는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가 살아서 갈릴리에서 전개했던 하나님 나라 운동열린 밥상공동체와 공짜 치유가 지금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에 의해 재현되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저들은 우리부활의 증인이라고 대제사장 앞에서 담대하게 말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듯이, 우리도 그렇게 해 보아라! 그러면 하나님 나라 운동이 끝장날 것 같으냐? 어림없는 소리. 옛날 아합 시대에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을 남겨두었듯이, 로마에 무릎 꿇지 않은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 그들이 끊임없이 예수의 말과 행동을 재연하고 삶을 살아낼 것이다. 예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들을 통해서 계속 부활할 것이다.” 사도들은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묻습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부활을 믿습니까? 아니 부활을 삽니까? 내 말과 행동과 삶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봅니까? 아니 우리들의, 우리 교회의 모습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발견합니까?

과거에 이현주 목사님은 부활을 혼자 죽어서 여럿이 살아난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제 스승 안병무 선생님은 부활은 예수 혼자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들을 포함해 오늘 제가 길게 한 말은 결국 부활은 연대와 계승이라는 말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일으키신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고 연대하는 것입니다. 그 거대한 구원의 화산맥()인 출애굽 사건, 지파 동맹평등공동체의 건설 운동, 이스라엘의 바로인 왕들과 그를 뒷받침하는 바알 신앙과 대결했던 예언 운동, 종말 신앙,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 바울의 에클레시아 운동을 오늘 여기서계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예수는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계속 부활할 것이고, 마침내 그 날은 올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