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마당 > 설교

설교

카테고리 2022년
제목 [5.8]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2-05-13
조회수 15
첨부파일
p220508_질그릇 1단.pdf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36그런데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그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가인데, 이 여자는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37그 무렵에 이 여자가 병이 들어서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겨서 다락방에 두었다. 38룻다는 욥바에서 가까운 곳이다. 제자들이 베드로가 룻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을 그에게로 보내서,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였다. 39그래서 베드로는 일어나서, 심부름꾼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그곳에 이르니, 사람들이 그를 다락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지낼 때에 만들어 둔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여 주었다. 40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시신 쪽으로 몸을 돌려서,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여자는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서 앉았다. 41베드로가 손을 내밀어서, 그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서, 그 여자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42그 일이 온 욥바에 알려지니,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43그리고 베드로는 여러 날 동안 욥바에서 시몬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묵었다. (9:36-43)

 

어버이날, 석가탄신일 축하

부활절 네 번째 주일인 오늘은 마침 58어버이날이고, 또 음력 사월 초파일석가탄신일이기도 합니다. 먼저 어버이날을 맞아 자녀를 낳아 기르느라 애쓰신 이 땅의 모든 어버이와 그들을 통해 이 세상에 오게 된 모든 자녀에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또 기독인으로서 석가탄신일을 맞아 이 땅의 모든 승가와 불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마침 지난 52일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이홍정 총무가 석가탄신일 축하 메시지를 발표했기에, 그 마지막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모든 불자와 기독인들, 여타의 많은 종교인에게 주어진 시급한 사명은, 모두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자기 비움의 마음으로 이웃과 자연을 위한 덕성을 발휘함으로 세상을 밝히는 일에 진력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이타적 덕행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때인지라 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가 더욱 깊게 다가옵니다. 맑고 밝게 살고자 하는 모든 지혜로운 사람들과 함께 불기 2566년 부처님 오신 날을 다시 축하드립니다.

 

제 마음과 바램 역시 이홍정 목사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독인임에도 불구하고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인이기에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흔히 오해하듯이 하나님만이나 예수 그리스도만이라는 기독교 신앙은 원래 배타성과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꿈꾸었던 정의·평화·생명의 해방 세상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이웃 종교를 포용하고 같은 희망을 품은 모든 세력과 연대하는 것을 뜻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기독교라는 울타리에 갇힐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 사고의 틀 안에 가두어 둘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웃 종교를 포용하고 그들과 연대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버이날은 자기 부모님만 공경하라고 제정된 날이 아닙니다. 남의 부모님도 자기 부모님처럼 공경하라고 제정된 날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도 불자(佛者)들만의 경축일이 아닙니다. 이홍정 목사님의 표현대로 맑고 밝게 살고자 하는 모든 지혜로운 사람들의 경축일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분이니 우리도 덩달아 커져야 합니다.


누가-행전개요

어버이날이요 석가탄신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사도행전 936~43절의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성서일과(RCL)가 부활절 네 번째 주일 본문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복음의 저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익명의 저자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별개의 작품이 아니라, 두 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작품으로 썼습니다. 단지 분량이 너무 많아 파피루스나 양피지 두루마리 하나에 다 써넣을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불행하게도 후에 신약이 전서로 엮이는 과정에서 둘 사이에 요한복음이 끼어 들어가 마치 둘이 별개의 작품인 양 여겨지게 되었지만, 본래 누가-행전은 두 권으로 된 하나의 복음서였습니다. , ‘누가-행전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하고 각각이 아니라 전체를 의도하고 쓴 것이기에, 누가복음 11절부터 사도행전 2831절까지의 어느 한 부분을 해석할 때는 그 전체 의도에 비추어 해석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잠시 누가가 두 권으로 된 그의 복음서를 쓰려고 했을 때 직면했던 문학적인 문제에 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는 첫 번째 책이 끝날 때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책의 주인공은 누구로 해야 할까요? 열두 제자들? 아니면 베드로와 바울을 두 주인공으로? 그것도 아니면 바울을 단독 주인공으로? 누굴 주인공으로 하든 두 번째 주인공은 필연적으로 첫 번째 주인공인 예수와 병행하게 되고, 그 둘은 동등한 주인공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구성적인 도전에 대해 누가-행전은 두 가지의 서로 엮어진 주제들(motifs), 즉 여행이라는 주제와 성령이라는 주제를 갖고 풀었습니다. 특히 누가는 그 둘을 결합해서 성령의 여행(the journey of the Spirit)으로 자기 복음서를 풀어나갔습니다.

누가-행전의 첫 번째 책은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의 길고도 느린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책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까지의 길고도 느린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누가-행전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갈릴리에서 유대교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누가복음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제국의 중심인 로마로(사도행전에서) 지리적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누가-행전은 예수 운동이 유대인의 고향에서 이방인의 세계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로마까지 확장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은 성령이었습니다. 첫 번째 책 시작 부분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내려왔습니다(3:22). 그다음에 예수께서 성령이 충만해서 요단강에서 돌아왔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갔습니다(4:1). 두 번째 책의 시작 부분에서, 오순절에 마치 불길의 갈라진 혀들처럼 성령이 눈에 보이게 내려왔고 열두 제자는 모두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2:1-4). 이후 사도행전 2825절까지 성령에 대한 증언이 계속해서 북소리처럼 울립니다.

이렇듯 누가-행전은 여행과 성령의 주제를 결합해, 첫 번째 책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이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고, 두 번째 책에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로 여행한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위치

누가-행전의 이런 큰 틀 가운데 오늘 본문 이야기가 놓여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도르가를 살린 이야기입니다. 본문 어디에도 성령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누가-행전의 (숨은) 주인공은 성령입니다.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베드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령이 그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본문 이전의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이미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예루살렘을 넘어섰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예수의 열린 밥상공동체를 재현한 예루살렘 공동체가 세워집니다. 그 공동체가 날로 번성하자 박해가 시작되고 그 와중에 스데반이 순교합니다. 하지만 그의 순교와 예루살렘 공동체에 대한 박해는 역설적으로 복음 확산의 계기가 됩니다.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 공동체원들이 흩어지자 그만큼 예수 운동의 지평이 넓어진 것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고, 마침내 사마리아인들도 성령을 받았습니다(8). 나아가 빌립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박해자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전향하여 예수 운동에 합류했습니다(9:1-31).

한편 베드로는 사방을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가서 팔 년 동안 중풍으로 자리에 누워있던 애니야를 고쳐줍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욥바로 불려가서 죽은 다비다/도르가를 살립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0장에서는 가이사랴로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을 찾아가 예수 운동에 대해 증언했는데, 거기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내리는 것을 목격하고 세례를 줍니다. 이렇듯 성령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나아가 유대 전 지역과 사마리아 지역까지 확산시킵니다. 더구나 하나님 나라 복음은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퍼져나갑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그 길목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다비다 쿰!

사도 바울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자기식으로 이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27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입니다. 28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입니다. (3:27-28)

 

바울은 이 선언에서 그리스도 안에있으면 인종차별도, 계급차별도, 성차별도 없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현존(現存) 모습이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at-one-ment) ‘속죄’(atonement)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누가-행전이 증언하는 예수 운동의 확산 이야기는유대인의 고향에서 이방인의 세계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로마로 확장된 이야기는 그 자체가 바울의 차별철폐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 선민인 유대인만의 구원에서 배제되었던 이방인까지의 구원이 그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 ‘예수 그리스도만이라는 주장은 유대인만이나 그리스도인만이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누구나라는 말입니다. “경계를 한정한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경계를 확대한다는 말이고, 나아가 경계를 없앤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끝 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여러 날 동안 욥바에서 시몬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묵었다”(9:43). 이 구절은 참 뜬금없습니다. ‘룻다에 있던 베드로가 간청받고 욥바로 와서 죽은 다비다를 살렸다면, 그리고 그녀가 제자였고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하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베드로는 당연히 그녀의 집에 머물렀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무두장이시몬의 집에서 며칠을 묵었습니다.

무두장이모피의 털과 기름을 뽑고 가죽을 부드럽게 다루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무두장이를 최하층 천민으로 규정하여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무두장이는 짐승 가죽을 얻기 위해 늘 죽은 짐승부정한 것을 만지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두장이 집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사람들이 그 근처에 가는 것조차 꺼리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하루가 아닌 여러 날을 묵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신분과 직업에 대한 그릇된 계급의식을 타파한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무두장이가 부정하여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이 부정하다면, 무두장이가 만든 가죽제품도 부정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무두장이는 부정하게 여기면서, 그가 만든 가죽제품은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이고 자기모순적입니까? 기독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이중성과 자기모순을 복음의 진리 안에서 극복해 가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복음 말씀을 이런 빛에서 이해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죽은 다비다가 살아난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베드로나 베드로 안에서 역사한 성령에 대한 찬양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이중성자기모순을 극복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다비다/도르가가 가젤(gazelle)영양(羚羊)이라는 예쁜 이름처럼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했다고 소개합니다. 그 증거가 과부들이 들고 온 속옷과 겉옷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속옷과 겉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일종의 재산이었습니다. 다비다는 기꺼이 자기 재산을 이웃 가난한 과부들에게 나누어주었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자선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그 자선은 경계를 넘지 못했습니다. ‘이너서클’(inner circle)내부 사람만을 위한 자선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여성 제자 다비다가, 아니 욥바의 기독인들이 그 경계를 넘어서기를 바랐습니다. 경계를 넓히고 확장하고, 궁극적으로는 없애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손수 무두장이 집에서 유숙했던 것입니다. 자기 몸과 삶으로 모범을 보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했던 말다비다여, 일어나시오!”라는 말은 이너서클을 박차고 일어나 그 밖으로 나가라는 말입니다. 자선에 머물지 말고 진짜 사랑을 하라는 말입니다. 자기만의 잔치를 넘어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찾아가 참 사랑을 베풀라는 말입니다.

 

가족의 탄생

최근 윤석렬 정부의 총리와 장관 후보자들이 청문회가 진행됐습니다. 왜 국민이 저들에게 절망하고 분노합니까? 저들이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하지만 자기 자녀사랑하는 것을 넘어 자기 자녀사랑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기득권자인 저들의 자녀 사랑은 결국 특권 독점이고, 다른 사람의 자녀는 처음부터 경쟁에서 배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결코 공정도 아니고 상식도 아닙니다. 그냥 특권 누리기일 뿐입니다.

20065월에 개봉된 김태용 감독의 영화 가족의 탄생이 있습니다. 가정의 달에 상영된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가족이 해체된 한국 사회의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군대 간다고 나갔다가 5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던 형철’(엄태웅 분)이가 혼자 사는 누나 미라’(문소리 분)를 갑자기 찾아옵니다. 그런데 스무 살 연상의 무신’(고두심 분)을 애인이랍시고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엄마 같은 남동생 애인과 셋이 함께 사는 것도 이상한데, 어느 날 무신의 전남편의 전처소생 어린 딸까지 집으로 들어옵니다. 그 후 형철은 다시 집을 나가 연락이 끊기고, 집에는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어른 여자 둘에 어린 여자 하나가 동거를 하게 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선경’(공효진 분)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선경에게는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씨 다른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엄마 매자’(김혜옥 분)가 유부남을 사랑하여 낳은 아이입니다. 유부남을 사랑한 것도 한심한 일이지만, 그와의 사이에 아이까지 낳아 기르는 엄마가 더욱 한심해 모녀는 티격태격 밤낮 다툽니다. 그러다 중병으로 엄마가 죽자, 의붓아버지는 떠나고, 선경은 씨 다른 남동생 경석이와 함께 삽니다.

별 연결점이 없는 이 두 가정이 나란히 소개된 이유는 선경의 남동생 경석’(봉태규 분)과 무신의 딸 채현’(정유미 분)이 연애하면서 엮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 다 평범하지 않은 가족사를 가진 이 두 남녀는 마침내 헤어지기로 합니다. 채현의 집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데 갑자기 대문이 열리더니, 미라가 나와 남자친구냐며 호감을 표시합니다. 채현은 우리 헤어졌다고 말합니다만, ‘헤어졌다고 밥도 안 먹냐?’면서 미라가 무작정 경석의 손을 잡아끌며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이렇게 해서 밥상에 둘러앉게 된 무신과 미라, 경석과 채현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 사이지만, 그 장면만 떼어놓고 보면 영락없이 할머니와 엄마, 아들과 딸처럼 보입니다. 글자 그대로 전혀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그즈음 집 나갔던 형철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는 이번에도 낯선 여자를 데리고 옵니다. 여자의 배는 형철이의 씨를 잉태하여 보름달처럼 부풀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누나인 미라의 반응입니다. 유일한 핏줄인 형철을 반기며 애지중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미라는 치매로 형철을 알아보지 못하는 늙은 무신을 감싸고, 형철이를 매몰차게 쫓아냅니다. 혈연중심의 가족이 더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혈연중심의 가족을 유지해왔습니다. 기독교도 부부와 그 자녀로 구성된 혈연가족을 오랫동안 하나님의 창조 질서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혈연이나 성, 신분이나 계급을 넘어선 새로운 가족을 선포했습니다. 새로운 가족은 혈연공동체가 아니라, 신앙공동체입니다. 자기 부모와 자녀를 공경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금수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기 부모와 자녀만 공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나쁜나 뿐인사람입니다. 우리가 청문회 대상자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들과 다른 점은 우리는 그들 같은 사회적 지위나 특권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만약 우리에게 특권이 있고 기회가 있다면 우리도 저들과 똑같이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여, 일어나시오! 혈연공동체를 넘어서시오!” 이 명령 앞에 우리는 과연 신앙인으로 어떻게 응답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