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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2년
제목 [6.19] 화해케 하시는 분 때문에 | 김애영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2-06-22
조회수 26
첨부파일
p220619_질그릇 1단.pdf

화해케 하시는 분 때문에

 

18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19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고후 5:18-19)

 

민족화해의 주일을 맞이하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서 615일부터 625일까지를 민족화해 주간으로 지키고 있고, 6.25 직전 주일을 민족화해주일로 지키고 있으며, 우리 교단도 오늘 619일 주일을 6.25 민족화해의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 압제로부터 19458.15 해방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항일투쟁을 전개할 당시 노선과 투쟁방식을 둘러싼 좌우대결이 해방공간에서 치열한 노선대립을 연출하였고, 급기야 일본이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이 각각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민족분단이 고착된 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결정적으로 6.25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그리스도교 복음과 미국을 동일시한 남쪽의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반공반북 정책의 최전선에서 북의 무신론을 규탄하며 반공전사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분단된 남과 북이 전개해 온 극심한 대결은 우리 민족 내부의 분열로 인한 것이기도 했으나,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 사이에서 벌어진 냉전 시대의 세계 분단의 덫에 걸려든 우리 민족의 비극입니다.

러시아 혁명 이래로 교회는 본격적으로 반공주의의 입장을 천명해 왔는데, 이러한 입장은 비오 11, 12세 등 역대 교황들의 칙서를 통해 강조되어왔습니다. 분열된 남북 각각의 정부가 출범한 1948년은 미ㆍ소 냉전이 더욱 격화된 해였으며, 이러한 국제적인 냉전시대의 최전선이 남과 북 사이에 형성되어 급기야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남한 사회는 오랫동안 반공 히스테리가 지배하게 되었고,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려 왔습니다. 그런데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때 새빨간 셔츠를 입고 전개한 붉은 악마응원전 축제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레드 콤플렉스를 깨트렸습니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는 올해 20226월에 개최된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브라질, 칠레, 파라과이, 이집트 축구 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다시 한번 붉은 악마의 응원 열기를 내뿜었습니다. 빨간색 혹은 붉은색은 소녀의 댕기에서부터 신부의 다홍치마, 조선조 관복, 장수의 깃발의 붉은색에서 볼 수 있듯이 원래 우리 민족의 삶과 깊은 관계를 지닌 색깔이며, 고구려 군사의 붉은 깃발은 적군을 당황케 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길인 황천길을 안내하는 명정도 붉은색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과 친숙했던 붉은색이 분단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붉은색을 좋아한다는 것은 빨갱이 혹은 용공분자로 의심받게 되면서 예전에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청홍의 머리띠가 청백 머리띠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2002년 월드컵 축구 경기 때 붉은 악마응원단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열렬한 응원전을 전개하자, 처음에 우리는 아니 붉은 악마라고? 게다가 붉은 셔츠 앞가슴에 흰색으로 “Be the Reds!” (응원단인 붉은 악마가 되자는 뜻)라는 글을 떡하니 새겨놓았으니 놀라자빠질 지경이었지만 우리는 기꺼이 붉은 악마의 셔츠를 입고 열렬한 응원을 전개했습니다.



고후 5:18-19에 제시된 신적 화해의 사건에 관하여

이제 우리는 6.25 민족화해 주간을 맞이하며, 저주에 가까운 남북의 오랜 적대감에서부터 벗어나 참된 민족화해의 성취인 통일이 어떤 기초에 서 있어야 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화해를 가장 단순한 형태로 제시하자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7-8, 1:) 고후 5:18ff에 의하면, 세상의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혹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고후5:19) 라는 구절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대신에 그가 정죄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고후5:10)


이처럼 화해는 처지의 뒤바꿈”, “교환”, “자리 바꿈에 의해 일어납니다. 즉 인간을 높이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낮아지셨다는 것이니,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을 얻게 되고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낮춤은 인간의 높임과 교환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자리에 서고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세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나타난 기적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화해 활동은 바로 하나님의 혁명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 안에서 화해되었듯이, 이제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입니다. 신적인 화해의 능력에 근거한 사랑, 원수 관계를 극복한 화해에 근거한 사랑 안에서는 적대자들도 배제되지 않습니다 (5:10)


예수의 가르침은 그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 즉 하나님의 성육신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가 있고 타당하다고 기독교는 주장합니니다. 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라는 육화 혹은 화육(incarnation) 언명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 분뿐인 이 나사렛 인간 예수 안에서만 우리 한가운데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성서에서 육신이라는 단어는 인간을 가없음, 덧없음, 그의 헛수고와 좌절과 허무라는 관점에서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 사건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 예수라는 육신 혹은 몸을 지니고 세상에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이 성서의 고백이고 증언입니다. “나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11:6).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고유한 걸림돌의 근원이 되고 있는데 어떤 선교나 신학이라 할지라도 이 걸림돌을 묵살하거나 단축시킬 수 없으니, 이 걸림돌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활 경험 이후에 행해진 교회의 설교는 우리를 위하심이라는 짧은 정식(定式)을 예수의 역사와 운명을 해석하기 위한 중심으로 삼았으며 그럼으로써 예수를 위타인간(爲他人間)으로 정의하였습니다. 고전 15:3-5에 전해진 바울 이전의 신앙고백에도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에서 나타나 있듯이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성서의 여러 문맥에서 우리를 위하심이라는 말은 1. 우리 때문에, 2. 우리에게 유리하게, 3. 우리를 대신하여 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후 8:9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그분은 당신을 인간과 동일시하시고 우리를 대신함으로써 상황을 뒤바꿨고 이렇게 해서 우리의 가난이 부요함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니 이러한 교환을 바울은 화해라고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분으로 말미암아 그 무엇이 이루어졌으니 곧 세상의 화해요 세상에 대한 죄의 용서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열어준 새로운 가능성은 사람들 사이의 화해와 일치도 이루어 준다는 것입니다. 3:28에서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 되는 사건이 바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신적 화해 사건에 기초해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갈라놓았던 균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메꿔졌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갈라놓았던 적대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는 것입니다 (2:13 ff). 이런 의미에서 16세기 신학자 멜랑히톤(P. Melanchthon)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분의 은혜를 아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각각의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의 자기정의 (自己定義)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됨으로써 인간은 이제 육체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이 되었다는 것이 오늘의 본문이 지시하는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상황이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했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반구원 (反救援)적인 상황이 새로운 시작, 즉 구원, 해방으로 이해되는 사건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 구원을 강조하는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서 와서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전1:30)


화해되지 못한 친밀하지 않은 사회와 세계에 관하여

성서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 앞의 고립된 개인으로 서 있는 존재로 생각된 적은 없었으니, 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구원의 사회적 차원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고후 5:18-19이 말하는 화해란 세상과 하나님의 화해로서의 인류의 화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사회적 측면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인간과 사회적 기구, 사회적 사물들, 물질과의 관계, 협동, 연대까지도 포함해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사건이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섬김이듯이, 인간은 그의 이웃에 대한 섬김 속에서 자신의 자유를 입증할 수 있고 또 입증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섬김 속에서 연대성이 발생해야 하고 그럴 때에 이웃에 대한 지배욕으로부터의 포기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첫째, 인간이 이웃과 만나면서, 혹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부딪히게 되는 물질적 문제를 되외시 해서는 안되며, 둘째, 잘못된 사회와 올바른 사회라는 것에 관해 생각하면서 어떻게 사회와 세상이 잘못되어 있는지 하는 문제를 결코 도외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화해의 역사는 인간 해방 (자연 생태계 해방을 포함해서)으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방과 자유는 항상 타자의 자유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610일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과 파라과이 축구 대표팀이 경기에 앞서서 파라과이 국가가 울려 퍼질 때 자막이 보였기에 저는 파라과이 국가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파라과이인들이여, 공화국이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파라과이 국가에는 화합과 평등이 다스리는 곳에서는 압제자와 노예는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후렴이 나옵니다. 이처럼 저 국가에는 압제자와 노예, 억압과 착취가 존재하지 않는 해방과 자유가 보장되는 세계에 대한 전 인류의 희구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화해되지 못한 사회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친밀하지 않은 사회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는 재산의 획득과 증식(增殖)이 지배하는 사회인데 다른 사람들과 존재들을 굴복시키고 방해하고 강탈하는 사회입니다. 이렇게 화해되지 않는 사회는 바로 평화가 없는, 갈등 사회, 적대관계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그것은 소외되고 물화(物化)된 사회, 형제 자매애가 없는 사회는 반사회적, 적대주의적 사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은총에 저항함으로써 철두철미 은총을 상실한 사회입니다. 하나님이 지배하지 않는 곳에서는 우상들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에 의하면 우상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맘몬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경제학- 철학 수고 1844>라는 글에서 자본-돈의 위력과 속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내가 해낼 수 없는 것, 즉 내게 있는 모든 힘으로도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

그것들을 나는 모두 돈을 통해서 해낼 수 있다.

 

돈은 불성실함을 성실함으로/ 성실함을 불성실함으로,

사랑을 미움으로/ 미움을 사랑으로,

덕을 패덕(悖德)으로 /패덕을 덕으로

노예를 주인으로 / 주인을 노예로,

우둔을 총명으로 / 총명을 우둔으로 뒤집는 힘이다.

 

이처럼 돈은 모든 속성들을, 그 속성과 모순되는 속성과도 교환한다.

돈은 불가능한 것까지 가능한 것으로 만들며,

자신과 모순되는 속성들로 하여금, 자신과 입을 맞추도록 강제한다.

 

하나님조차도 하지 못하는 일을, 돈이 해낸다.

 

우리는 화해되지 못한 사회의 출현형태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특징들 중 가장 압도적인 것이 바로 화해되지 못한 사회, 세계라는 사실입니다. 설교 첫 머리에서 저는 6.25 직전 주일을 민족화해주일로 지키게 된 연유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우리는 결정적으로 6.25

전쟁의 경험과 트라우마 때문에 6.25가 다가오면 아아 잊으랴 우리 이 날을~~~이제야 갚으리 이 나라 이 겨레~~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이라는 6.25 노래를 핏대를 세우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노래 부르면서 북에 대한 적개심에 온 나라가 오랫동안 히스테리적 적대감에 휩싸여 온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냉전체제의 구도 속에서 남과 북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체제 선전을 위한 쇼 윈도우(show window)역할에 이용되어 왔습니다. 6.25 전쟁 기간 동안에 핵무기를 제외한 모든 중화기와 근대 병기가 이 땅에 투입되어 신개발 무기의 실험장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남북한 민간인 사망자, 행방불명자, 부상자만 368만 명에 달했는데 민간인 피해의 남과 북의 비율이 1:3이었다고 합니다. 한 외신기자의 증언에 의하면, 미국 스스로 주장하기를 6.25 전쟁으로 북한을 석기시대로 돌려놓음으로써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초토화시켰다고 하였으니 북측은 북측대로 미국과 남측을 향해 원쑤를 무찌르자, 각을 뜨자는 적대감이 오랫동안 북측을 지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쪽의 우리는 대체로 6.25 전쟁으로 인한 우리의 피해와 트라우마에만 고착되어 절대로 6.25를 망각해서는 안되며 저 북의 원수를 무찌르자고 외치며 살아왔습니다.


인류 역사를 들여다보면 세계 국가들이 저질러온 여러 종류의 전쟁 모습은 화해의 영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유와 불화의 영의 자식들에 의해 지배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몇 년째 인류를 괴롭혀 온 코로나19 팬데믹이 어느 정도 진정되면 힘든 상황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좌절시킨 사건이 바로 현재 진행 중인 바, 러시아에 의한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전쟁이며, 이로 인한 세계의 고통이 끝이 아니라 이 고통의 여파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죽기 살기 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투쟁, 전쟁의 양상은 세계 패권을 쟁취하기 위한 특히 경제적 탐욕과 탈취의 문제가 똬리처럼 자리잡고 있습니다.


루가노 보고서(The Lugano Report)라는 책은 스위스의 유명 휴양지인 루가노 호숫가에서 작업한 보고서입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생태계 파괴는 거의 파국적인 규모에 근접하고 성장의 내용은 온갖 반사회적 활동으로 채워지며, 빈부격차가 극대화되고 그에 따른 극단적 갈등으로 사회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금융시장 파탄의 위험도가 날로 증대한다는 보고서입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2030년에 80억까지 증가하리라 예상되는 인구를 갖고서는 생태계 파괴와 체제 불안 요소의 폭발적 증가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부분입니다. 이 보고서의 작성자들은 자본주의의 생존에 필요한 인구감축의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방안을 위하여 2030년까지 현존 60억 인구의 2/3에 해당하는 40억 정도로 인구를 감축해야 한다는 끔찍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종족근절’(genocide)과 같은 것들은 몽매하고 비효율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루가노 보고서에서 제시되고 있는 인구감축전략과 같은 대책들은 세계의 지성을 대표할 만한 자본주의 세계의 소수의 학자들이 모여 생각해 낸 것으로서, 다만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해 벌이는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인구감축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더욱 더 암울한 극단적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얼터드 카본’(Altered Carbon)이라는 미국 드라마에서 주인공 타케시 코바치가 자신에게 새 삶을 부여한 므두셀라에 대해 ()인줄 알았으나 결국은 악마였다고 탄식하는 대사가 나옵니다. 성서에 나오는 가장 오랫동안 생존한(969) 인간인 므두셀라는 이 드라마에서 상위 0.001%의 상류층을 지칭하는데, 이들은 부와 권력, 명예를 모두 장악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이들은 죽지 않습니다. 반면에 대다수의 사람들인 그라운더(grounder)는 므두셀라를 신처럼 받들고 동경합니다. 이들은 기술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연명하기에 분주한데, 대부분의 일자리는 인공지능(AI)과 로봇으로 자동화되어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극단적 사회 양극화, ‘초계급화 사회가 고착된 암울한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또한 ‘2090 미래보고서에 의하면, 2090년 미래는 4계급으로 재편되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즉 최첨단 기술을 독점한 기업인 0.001%가 최상층을, 새 기술을 활용해 대중의 선망을 받는 연예인, 스포츠 스타, 정치인으로 구성된 인기스타가 제2계급을, 사회 각 분야의 중요 일자리를 대체할 인공지능이 3계급을, 나머지 99.997%의 사람들이 제4계급을 차지한다는 암울한 미래 계급 전망이 제시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 세상이 바로 화해되지 못한, 그렇기 때문에 친밀하지 않은 사회요 세상인데 사실상 맘몬이라는 우상, 자본 혹은 돈이 위력을 떨치고 있는 사회요 세상입니다.


화해케 하시는 분 때문에 우리는 민족화해의 성취인 통일을 향해 나가야 한다!

인류는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시대를 헤쳐 나오면서 화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오늘의 한반도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진정한 실험의 장이라고 재일동포 강상중 교수는 주장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화해는 남북을 오가며 평화공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평화통일을 성취할 때 남북 사이의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의 성취는 이런 의미에서 이 세계에서 전개될 최대의 화해 사건이며, 이를 위해 고투하고 있는 우리 각자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진정한 실험의 장인 한반도 화해 사건의 주체가 될 수 있는데 이러한 화해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신적 화해라는 기초에 서 있어야 합니다. 즉 화해케 하시는 분 때문에 우리는 민족화해의 결실로서의 통일을 성취해야 합니다.


백범 김구선생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는 감동적인 말씀을 남겼습니다.


분단 초기에 남측은 북진통일, 북측은 적화통일을 추구함으로써 남북 모두 적대적 통일, 흡수통일이라는 일방적 통일과 통일 방안들을 오랫동안 고집했으나, 점차 상대방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방향 전환에 있어서 극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 19727.4 남북공동선언입니다. 2000년 평양에서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고 6.15공동선언을 채택하였으며, 200710월 평양에서 10.4선언이 발표됨으로써 평화통일의 기반이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 보수 정권이 집권할 때마다 어렵게 일구어온 남북 화해와 교류협력관계를 전면 부정하는 정책이 반복되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현충일 추념사에서 북을 겨냥하여 오랫동안 우리 뇌리에서 거의 잊혀졌던 공산주의 세력이라는 단어를 운운하였으며, 외교안보 라인과 주요 국가 대사들을 대북 강경 인사들로 배치하였으니 앞으로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러시아 등과 우리나라의 관계 설정도 큰 난관에 봉착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의 성경 본문에서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건에 기초하여 민족화해의 진정한 결실인 통일에 대비해야 합니다. ‘도둑처럼 다가올 수 있는통일과 통일 이후를 대비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인가에 대해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화해 통일의 모습은 단지 남북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만의 기쁨이 아니라 산들과 언덕들이 소리 높여 노래하며 들의 모든 나무들이 손뼉 칠”(55:12) 그런 방식으로 온 피조물, 생태계 전반의 구원과 해방의 성취를 기뻐하는 모습으로 화해통일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지난 세기에 있었던 미소의 극한 대결의 냉전체제로 복귀하는 것이 아닌가? 세계 경제 시스템이 붕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오늘의 냉혹한 현실에 직면해서, 우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해 있는, 우리 인간들이 임의대로 조작할 수도 없는, 그러기에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정의롭고 평등하고 아름다운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추구를 더욱 더 간청해야 합니다. 세상적 잣대로 보면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세상의 불행을 피할 수도, 자신의 무능을 제거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변혁을 수행할 수도 없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혁명적 변혁이 우리 신앙공동체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이를 세상에 강력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하며 선포해야 합니다. 아멘.